안녕. 노회찬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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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은 내게 좋은 선생이었다. 그를 통해 배운 것들이 많다. 그런 그가 떠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냥 그렇게 떠났다. 처음에는 먹먹했고, 나중에는 아쉬웠고 끝내는 화가 났다. 화가 났다. 따져 묻고 싶은 일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그는 긴 시간 진보 정치의 상징이었다. 그를 통해 책으로 배웠던 진보적, 좌파적 가치가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되며 기능하는지를 간접 체험했다. 아마 진보적 좌파적 가치를 지향하는 많은 이들에게 노회찬은 그런 존재였을 테다.

나는 묻는다. 진보의 가치는 무엇인가? 도덕적 완결성인가? 나는 믿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러운 죽음으로 그것이 진보의 가치가 될 수 없음을 배웠다고 믿었다. 많은 진보 정치인들이 그것을 배웠다고 믿었다. 누구보다 영민했던 노회찬이 그걸 배우지 않았을 리 없다고 믿었다.

정치판은 늑대들의 싸움터다. 사람이 갈만한 곳이 못 된다. 서글픈 역설은 늑대들의 전장에 사람들의 삶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들은 늑대의 전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사람을 사랑한 죄로.

늑대와 싸우는 자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사람으로 싸우다 늑대에게 뜯겨 죽을 것인가? 늑대와 싸우기 위해 자신도 늑대가 될 것인가? 노회찬의 빈소에서 서럽게 울었던, 어느 정치인은 그 불행한 두 가지 선택을 피하고자, 정계를 은퇴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노회찬은 끝끝내 사람으로 남아 늑대와 맞서 싸우는 선택을 했다. 그것이 그가 늑대에게 갈갈이 찢겨 죽임을 당한 이유다.

그는 힘들었을 테다. 불의와 부조리, 편법에 대해 그리도 신랄하게 비난하고 비판했던 그 아니었나. 그러니 자신의 말처럼,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다. 자신이 내뱉은 말들이 칼날 같은 부메랑으로 되돌아 왔을 테다. 그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함께 해왔던 동지들에게 폐가 되는 것이었을 테다.

결국 그는 진보의 가치를 도덕적 완결성으로 삼았다. 백옥 같이 하얀 옷이 자신과 동지들의 정체성이라 믿었던 게다. 그렇게 하얀 옷의 무게에 짓눌려버렸다. 늑대들의 눈에, 아니 늑대와 싸우기를 거부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을 작은 얼룩을 견뎌내지 못했던 게다. 그 백옥 같이 하얀 옷 때문에. 노회찬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늑대와 싸우면서 어찌 흰 옷일 수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진보의 가치는 무엇인가? 적어도 도덕적 무결성이나 완결성은 아닐 테다. 나는 진보의 가치가 상상력이라고 믿는다. 선택 너머의 선택을 꿈꾸는 상상력. 지금 세상 너머의 어떤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힘이 진보의 가치라 믿고 있다.

남겨진 자들의 숙제가 있다. 늑대와 싸우지만, 사람으로 살며 늑대에게 갈갈이 찢겨지지도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늑대가 되지 않으면서 세상에 널린, 아니 세상이라는 늑대에 맞서 싸울 방법은 무엇인가?

노회찬이 떠난 지금, 다음 시대의 진보적 가치를 되물을 때다. 그것이 그를 제대로 추모하는 방법이라 나는 믿고 있다. 떠난 자의 남긴 것들을 이어받는 것이, 남겨진 자들의 의무다.

누군가는 죽음으로서 산다. 영원히 산다. 노회찬이 그렇다. 노회찬이라는 별은 졌기에, 영원히 빛날 테다. 노회찬과의 이별에는 두 번의 인사가 필요하다. 그는 죽음으로서 영원히 살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울지 않을 테다.

안녕 노회찬. 안녕 노회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