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섬에 대한 짧은 상념] 구로디지털단지 (Guro Digital Complex)

in #kr7 years ago (edited)
  • <Holden!>에 실렸던 "서울의 한 섬에 대한 짧은 상념" 3부작 중 3번째, 마지막 글입니다. 이번에는 서울 서남권의 핵심 산업단지 중 하나인 구로디지털단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 기본적으로 저는 항산(恒産)이 항심(恒心)을 낳는다는 맹자의 주장에 상당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술인들이 특정 공간을 신명나게 바꿔놓더라도, 그 이면을 지탱하는 이들이 어떤지에 대해 강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글도 그런 소박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글의 수준은 여전히 조악하기 이를 데 없으나, 이런 시선도 있다는 느낌으로 가벼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글을 작성한 시점이 2013년 12월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또는 제 게으름으로 사실관계가 틀린 내용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점이 보이면 바로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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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齊)나라의 왕이 맹자(孟子)에게 정치의 바른 방도에 대해 물었을 때, 맹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충분한 재산이 없어도 떳떳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오직 뜻있는 선비만이 가능합니다(無恒心而有恒心者有士爲能 若民則無恒産因無恒心)." - 맹자 양혜왕(梁惠王) 編 상(上)

  • 관자(管子) 역시 "창고가 꽉 차야 예절을 알게 되고 의식이 넉넉해야 영욕을 알게 된다. 예의는 재산이 있으면 생기고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倉廩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禮生於有而廢於無). - 관자 목민(牧民) 編

1.


  • 우리가 으레 '아름다운 도시'라고 일컫는 곳은, 여행자에게 있어 매력적인 요소를 많이 품고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고색창연한 건물이라든지 수세기를 걸쳐 내려오는 풍속 내지 관습 같은 예(藝)적인 것이 그렇다. 그러나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것은 탄탄한 경제력 위에 기초한 경우가 비재하다. 일례로 많은 볼거리 및 즐길 거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스탄불로 말할 것 같으면, 터키의 전체 무역량 중 약 55%를 차지하며 터키의 국민 총생산의 21.2%를 담당한다. 2005년 이스탄불 시의 국내 총생산(GDP)는 무려 133억 달러로 추계되었다.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는 맹자의 지적은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저 총생산 중에는 항산의 밑바탕 위에 만들어진 예술 등을 향유하기 위해 온 관광객의 소비도 포함되니만큼, 둘 간의 경계는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이 일도양단 식으로 명확히 갈리면 참 편안하겠거니와, 그런 편안함은 아직까지는 허용되지 않는 듯 싶다.

  • 흔히 '서울답지 않다' 고 일컬어지는 풍경은 통상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녹음이 즐비한 산천 등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서울이 마천루가 빽빽하게 늘어선 공간만 가득할 것이라는 일종의 고정관념 하에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굴뚝'이 즐비한 공간, 즉 산업 지역에 대한 감상일 테다. 전자는 위락공간으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했고 많은 이가 찾아가는 곳이다. 한편 후자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쏠려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생업의 공간은 기본적으로 고달픔을 내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애인을 보듯 매일 같이 찾아가야 하는 그 곳의 모습은 대체 어떠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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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른바 '국가 발전'을 위한 전략으로서의 산업단지는 오래 전부터 추진된 바 있다. 그 중에서도 서울 내에 위치한 구로디지털단지의 경우, 1964년 5월 20일 사단법인 한국수출산업공단(현:한국산업단지공단)이 설립되어 본격적인 수출산업공단의 조성이 시작되었다.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수출산업공단 제1단지를 세웠으며 이후 구로공단이라 불리게 되었다. 조성 당시 총 면적은 약 1,982,000 m²였으며 이 가운데 산업시설 면적은 1,500,000 m²였다.

  • 2012년 조사에 따르면, 198만2천㎡ 면적의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는 1만여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14만 여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수출산업단지로 조성돼 전성기인 1970년대 후반에는 11만여 명의 ‘산업역군’들이 이곳에서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 피땀을 흘렸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재벌기업이 주도하는 중공업으로 산업의 중심이 이동하고, 1985년 구로동맹파업 등 노동운동이 불붙으면서 공단 입주기업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 1995년 공단 노동자 수가 4만2천명 수준으로 줄자, 정부는 2000년부터 당시 붐이 일었던 정보기술(IT)산업 위주의 첨단 지식산업 단지로 육성하기로 하고 구로공단의 산업 고도화 정책을 펼쳤다. 이름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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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때부터 구로공단의 스카이라인이 바뀌기 시작했다. 구로동맹파업의 시발점이 된 대우어패럴 자리는 오렌지아울렛, 효성물산은 마리오아울렛과 같은 패션타운이 됐고, 갑을전자가 있던 곳엔 대륭테크노타워 8차 등 아파트형 공장이 세워졌다. 구로디지털단지역 인근의 1단지는 저층건물을 찾기 힘들어졌고, 가산디지털단지역 양쪽의 2·3단지도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이 초고층 아파트형 공장으로 바뀌었다. 한국산업단지공단, 서울시 등이 주는 중소기업육성 혜택 덕분에 제조업·정보기술업·물류업 등을 하는 중소기업이 아파트형 공장을 메웠다.

  • 변한 것은 공간만이 아니다. 산업단지 고도화 전략에 따라 제조업으로 대변되는 구산업 노동자의 비율이 줄고 출판·영상·방송통신 및 정보서비스업 등 신산업 분야 노동자의 비율이 증가했다.

2-2.


  • 구로디지털단지(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총 생산액은 7,614억원으로 2010년 12월 (7,576억원) 대비 0.5% 정도 증가하였으며, 지난해 동월(2010년 1월 4,768억원) 대비 약 164%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서울 전체 GRDP의 약 0.27%를 혼자서 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박준영(2011), 서울디지털산업단지(G밸리)의 발달과정과 입지변화,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 석사논문, P.59)

  • 다만 저 숫자는 미시적 단위가 아니라 거시적 또는 총계적 단위의 합(aggregated sum)을 통해서 생성된 개념이다. 고로 우리는 저 숫자가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또한 저 안에 담긴 미시적 단위의 이야기들 - 감성적으로(!) 말하자면 늘 피곤한 몸을 쉬지도 못한 채 잔업 및 특근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려야 하는 이들의 한숨과 눈물 - 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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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를테면 "1991년 봄,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전보해(가명·40·여)씨는 21년이 지난 지금도 구로공단의 휴대전화 조립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정밀성을 요하는 작업이라 휴대전화에 얼굴을 파묻고 일할 수밖에 없어 어깨와 목·손목 등이 금세 아파 오지만 휴식시간은 오전 10분, 오후 10분, 점심시간 1시간뿐이다. 평소 근골격계 질환을 달고 살아도 병원에 갈 시간"조차 없을뿐더러 "이렇게 일해 전씨가 손에 쥐는 돈은 기본금에 상여금을 더해 월평균 130여만원 남짓. 법정 최저임금에 연장 근로수당을 더한 수준"이라는 이야기는 저 안에서 확인할 방도가 없다. (<구로아리랑 上> 20년간 최저임금 받은 여공의 한숨, 한겨레신문 2012년 1월 8일, 박태우 기자)

  • 첨단 지식산업의 메카라고 불리지만, 여전히 옛 구로공단의 흔적인 4000여개의 제조업체가 아직 남아 있고, 5만3000여명의 제조업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 그러나 첨단산업이라는, 이른바 IT 분야의 노동자도 상황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2011년 서울 남부지역 노동자 권리 찾기 사업단 ‘노동자의 미래’가 이 지역 아이티 노동자 213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8%가 주당 45시간 이상 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하루 10시간 넘게 근무한 날이 한 달에 20일을 초과하는 아이티 노동자도 23.5%나 됐다. 일반 사무직 노동자는 이 비율이 9.4%에 불과하다. 장시간 노동은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응답자의 10%는 업무상 탈진을 호소했고, 61%는 허리·어깨 등에 질환이 있다고 답했다. (<2012 구로 아리랑 (하)> 꼬리문 하청 ‘IT 노가다’ 양산…‘한국판 잡스’ 영원한 꿈, 한겨레신문 2012년 1월 9일, 박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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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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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로디지털단지 역을 필두로 하여 그 주변에 넓게 펼쳐진 이 산업단지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지하철역이라든지 주변의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낫다. 거기에서 목도하게 되는 것은 광활한 대지를 메우고 있는 수 천, 수 만동의 자그마한 건물이다. 게다가 과거 도시계획 시절에 일률적으로 지어진 양 흡사한 외양을 띠고 있는 것까지, 정말이지 생경한 모습이 펼쳐진다. 물론 으리으리한 자태를 뽐내는 신축건물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주종을 이루지는 못한다. 저 작은 건물 안에서 생을 '소모'하는 덕에 이 서울이 지탱된다고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숙연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 지역의 총 생산액은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은 서울 전체 지역 총생산의 0.3%에도 미치지 못한다. 서울이라는 추상적이고 와닿지 않는 것을 떠받친다고 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동의 새벽을 열어야 하는 우리네 평균적 가장을 떠올리는 편이 보다 와닿을지 모르겠다.

3.


  • 사실 이런 산업단지의 모습은 비단 서울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전국산업단지현황통계(13.2분기)에 따르면, 2013년 2/4분기 산업단지는 전분기 대비 9개가 증가하여 총 1,009개이며, 산업단지 지정면적 1,455k㎡, 분양률 94.7%, 입주업체 7만 8천개사, 누계생산 502조원, 누계수출 2,062억불, 고용 1,948천명으로 조사된 바 있다. 성급한 일반화의 한계는 차치하고서라도, 전국 1009개 산업단지에서 이런 모습이 매일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 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람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같은 사무실을 방문하고, 그 안에서 또 울고 웃으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런 이들이 한데 모여 자아내는 풍경을 밴드 언니네이발관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모든게 잊혀져간 꿈이 되어 그 빛을 잃어가
그를 아는 사람들은 소리내어 찾지 않나

가리봉시장에 밤이 깊으면
가게마다 내걸어 놓은 백열전등 불빛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되는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긴 노동 속에 갇혀있던
우리는 자유로운 새가 되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깔깔거리고
껀수 찾는 어깨들도 뿌리뽑힌 전과자도
몸부며 살아가는 여자들도 술집 여자들
눈을 빛내며 열이 오른다

가리봉 시장에 밤이 익으면
허기지고 지친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닿을길 없는가요 슬픈 마음뿐인걸
잊어야 하는가요 슬픈 마음뿐으로
그를 아는 사람들이 소리내어 찾지 않네

언니네이발관 - "가리봉 시장"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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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구디말고 가디로 출근했던 기억이 ㅎㅎ
추억이군요 ㅠ

가끔 출장을 가는데요...
참 힘든표정을 가지신분들이 많아 우울했던 기억이 있네요..ㅜ

유독 구디단 쪽 출근하는 분들이 그런 기억이 나더군요. 실제로도 게임업계로 대표되는,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노동환경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아서 그런 듯 싶습니다 ㅠㅠ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