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행복을 측정하기

in #kr6 years ago



우리 가족은 매주 각자의 삶의 경험이 어떠한지 체크하는 시간을 갖는다. 올해 나의 OKR에 가족이 더 행복해진다는 Objective가 있는데, 행복을 정량화하는 게 쉽지 않다 보니 Key Result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발견한 게 상담에서 활용하는 ORS(Outcome Rating Scale)였다. 내가 상담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ORS의 단순 명료한 항목들과 어린아이들도 할 수 있는 손쉬운 마킹 방법이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를 개선하려면 진척도를 보여줄 수 있는 핵심 지표를 정하고 그 지표의 변화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피드백하는 체계가 필요한데, ORS는 양식이 간단해서 충분히 빠른 피드백 루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ORS를 차용해서 양식을 만들고 가족의 행복을 측정하는 도구로 삼기로 했다.(음.. 아솔이는 글은 고사하고 말도 못 하니 측정할 길이 없어 Key Result에서 빠졌다..)

아린이의 응답지는 CORS를 참고해서 스스로에 대해, 가족 안에서, 어린이집에서, 그리고 삶의 전반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측정하는 항목으로 만들었다. 나와 아내는 ORS 양식을 그대로 활용해서 Individually, Interpersonally, Socially, Overall로 측정했다. 나와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아린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측정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아내와 나는 4개의 항목이 거의 비슷하게 움직였다. 가족 안에서 겪는 어려움은 곧바로 개인의 영역에서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식이다. 하지만 아린이는 격차가 꽤 컸다. 특별히 어린이집에서의 경험이 굉장히 좋지 않은 상황을 확인하게 됐다. ORS는 총점이 25점 이하이면 상담이 필요한 상태로 본다고 하는데, 아린이의 총점 또한 계속 낮게 유지되었다.



어린이집에서 많이 힘든가 보구나, 무슨 일이 있니?



그게 한 네 번째 측정 때였을 것이다. 측정을 하는 이유는 문제가 있는 부분을 인식하고 필요한 조치를 하기 위함이다. 아린이가 어린이집에서 힘든 경험을 하는 이유를 물어보자 선뜻 두 가지를 알려줬다.

  1. 바느질 놀이가 너무 어렵다.
  2. 가위로 종이 오리기가 너무 어렵다.

아이에겐 이것이 삶의 행복을 좌우할만한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므로 '에이. 잘했던데? 뭘 그것 가지고 그래.'라고 하지 않는다. "아- 아린이는 바느질과 오리기를 잘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했구나?"하고 마음을 읽어준다. 그러면서 나도 잘하고 싶은 게 안 될 때 얼마나 좌절스러웠는지 떠올려보며 아린이의 마음에 공감한다.

바느질 놀이는 벌써 한 달은 되었을 일이다. 어느 날 어린이집에 다녀온 아린이가 뭔갈 투덜대면서 보여줬다. 교육용으로 만든 털실을 연결한 큰 바늘로 옷 모양의 종이를 꿰매 보는 놀이가 있었나 본데 자기 혼자만 완성하지 못해서 선생님이 집에 가져가서 해보라 했다며 풀이 죽어 있었다. 살펴보니 종이에 나 있는 바늘구멍이 군데군데 찢어져서 어떻게 해도 엉성함을 피하기 어려웠다. 심미적 기준이 높은 아린이는 아마 그 꼴을 못 보겠기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을 거고 '아 난 바느질 못해'라고 생각했을 게 뻔했다. 일단 바느질 놀이에 대해 이런 정보들이 있으니 즉각 도움을 주기로 한다.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기



좋지 않은 경험은 새로운 경험으로 극복할 수 있게 해주면 좋을 것 같아 바느질 놀이를 만들어서 같이 해보기로 했다. 종이가 잘 찢어지는 게 어린이집 교재의 문제였던 거 같아서 나는 박스 날개를 하나 뜯어서 테두리를 돌아가며 펀치로 구멍을 냈다. 그리고 바늘을 만들기 위해 무인양품에서 산 마 끈을 적당히 잘라서 한쪽에 매듭을 만든 다음 빨대에 넣고 길게 빼고 매듭이 빨대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도록 라이터로 살짝 지져서 끝을 좁혔다.




이걸 두 세트 만들어서 바느질의 원리 —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오고 — 를 잘 설명해준 다음 같이 실습을 해보았다. 약간의 도움을 받아 가며 더듬더듬 첫 번째 세트를 잘 해냈다. 아린이는 신이 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트를 시작하자마자 실수를 하나 하더니 또 풀이 죽었다.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가야 하는데 두 번 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온 것이다. 나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런 바느질 기법도 있으니 그대로 계속해보면 어떠냐고 했고, 아린이는 그 방식 대로 정말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었다.

아린이는 너무 신이 났고 그걸 내일 어린이집에 가져가서 선생님에게 보여주겠다며 자기 가방에 넣었다. 순간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아이를 힘들게 했다는 게 이해되는 면이 있어 안쓰러웠고, 그걸 미리 알아차리고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다음날 퇴근해보니 아린이는 선생님에게 신나게 자랑을 하고 와선 우리가 만든 작품에 크게 이렇게 적어 줬다. '아빠 사랑해요.'




나는 이 활동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 Bernard M. Bass가 말한 조직을 변혁시키는 리더의 네 가지 특징 중에 Individualized Consideration, 즉 개인에 대한 케어가 있다. 뭉툭하게 '팀'으로 소몰이하듯 어르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의 구성원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여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 리더이기 앞서서 가족의 리더이고, 가족의 변혁을 이끄는 리더가 되고 싶기 때문에 이런 활동이 나의 리더십의 질을 높이는— 굉장히 의미 있는 접근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반복하기



바느질이 해결되었다고 아린이의 어린이집의 경험이 즉각 개선되진 않았다. 그래프를 보면 그 후로도 계속 점수가 낮다. 아린이는 특별히 한 친구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 밥 먹는 시간에 천천히 먹어서 지속적으로 지적을 받는 것, 낮잠 시간에 잠이 오지 않는 것, 선생님께 인사하는 게 부끄러워서 인사를 못하겠는 것, 여전히 가위질이 어려운 것 등을 이야기해줬다. 아내와 나는 또 그런 접근을 반복한다. 아내는 아린이에게 뭔가를 잘 못한다는 것은, 연습을 하면 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성장 마인드 셋을 주려고 노력했고, 낮잠이 안 오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아린이가 이불이 더워서 잠이 안 온다는 걸 알게 되어 어린이집 이불을 얇은 걸로 교체해주었다. 그리고 선생님과 아린이의 요즘 경험에 대해 이야길 나누는 등 다각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섯 살 아이의 삶도 이렇게 어려움이 많고 도움이 필요하다. 이번 일을 통해 그걸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과 구체적으로 측정하고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방식이란 걸 알게 됐다. 이 체계로 나의 상반기 OKR 중에 하나는 든든한 나침반을 얻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