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하류지향

in #kr7 years ago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지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합은, 불행히도 긴 세월에 걸쳐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모두가 평등하게 투표권을 행사해서 대표자를 뽑는 대의민주주의는, 자본력을 동원한 홍보와 언론에 의한 막판 여론몰이가 선거판을 결정하곤 하는 불완전한 정치체제다. 민주주의 탈을 그럴싸하게 뒤집어 쓴 자본주의라고 할까. 좀 더 세련된 입법을 통해 보완이 가능할 듯 하지만, 그 일을 맡은 자들은 최선을 다해 그러한 개선안을 거부한다.

기득권을 의한 정책, 기득권을 위한 법과 제도에 힘입어 빈부격차는 꾸준히 커져왔고, 이제 근로소득과 금융소득의 효율성은 엉금엉금 기는 아기와 비행기의 차이만큼 큰 속도차를 보인다. 자본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인간은 소외되어 왔고, 공동체는 크게는 지역공동체, 평생 직장이었던 회사부터 가족이라는 최후의 보루까지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태도, 예절, 언어, 보살핌 등 가정이 담당하던 기본적인 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그러하듯 ‘외주’를 통해 서비스업으로 적극 대체할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은 어찌 보면 이런 시스템에서 살아남기에 최적화된, 소비주체로서의 삶을 매우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다.

어릴 적부터 자본주의, 황금만능주의를 보고 배워온 아이들은 더 이상 선생님과 학교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배움 자체에 의문을 갖고 적극적으로 배움을 혐오하며 결국 배움을 포기한다. 매사에 의문과 창의성을 가지라고 하더니 이걸 왜 배우냐는 아이들의 질문이 왜 나쁜 것일까. 이는 해당 질문이 나오게 된 배경이 순수한 궁금증이 아닌, 소비주체로서의 판단과 평가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무슨 뜻이지?’ 가 아닌 ‘이걸 배우면 무슨 이득이 있지?’ 라는 질문인 것이다.

부모의 대화를 반복해서 듣다가 언어를 깨치는 아이들은 모국어가 유용하다고 생각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국어에 노출 되면서 자연스러운 말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일단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 생기고, 언어를 배워 그 의사를 겨우 표현할 수 있게 될 시기에 ‘왜 배워야 하냐’ 는 질문을 하게되면, 배움이 끝나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배워 보기도 전에 지레 판단하고 거부하게 된다. 이러한 배움에 대한 의기양양한 거부가, 결국 교육받을 권리를 포기하고 미래를 헐값에 팔아버려 자신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임을 당사자는 결코 알지 못한다.

일본인인 저자가 문제로 인식하는 일본의 ‘하류지향’ 세대가 교육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나이를 먹어 부모의 품에서 강제로 배출되어 고립된 청년들 이라면, 한국의 상황은 비슷하면서 좀 다르다. 아이들은 교육에 대한 거부와 의문은 일단 가슴에 품은 채, 하기 싫은 초중고 교육 과정과 학원에 억지로 떠밀려 끌려가면서 배움에 대한 즐거움과 의미를 잃어버린다. 대학은 학문의 깊이 있는 심화과정을 제공하는 곳도, 사업이나 근로를 위한 필수적인 지식을 가르쳐 주는 곳도 아닌 모호한 스탠스를 유지하며, 그저 교육 비즈니스의 연장선으로 애꿎은 비용과 시간을 앗아간다. 사회가 제공 할 수 있는 대졸 일자리 보다 훨씬 많은 수의 대졸자가 매년 배출된다.

그렇게 우리 세대, 다음 세대들은 배울수록 하향 평준화되고, 노동을 도피하고, 고립된다. 확고한 황금만능주의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냉소와 비난으로 똘똘 뭉쳐 세상에 나온다. 가진자와 못가진자, 회사와 노동자, 보수와 진보, 전라도와 경상도, 남자와 여자로 편을 갈라 싸우고 부추기며, 쉽게 말하고 쉽게 타이핑한다. 부모님, 우리, 자라나는 세대 그 누구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문제의 원인이고, 문제 그 자체이며, 문제를 해결할 당사자 들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서로 보듬고,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인식하고, 인간적으로 성숙한 세대를 길러내는 일에 힘써야 한다. 많은 고민거리가 남고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 졌지만, 날카로운 통찰과 풀이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