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 <모든 이름들>(혹은 <이름없는 자들의 도시>)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7 years ago

l9788970751528.jpg

한 남자가 밤을 틈타 학교에 숨어 들어간다. 캄캄한 서무실, 몸을 먼지로 뒤집어 쓴 채 그는 손전등 하나를 들고 그곳에 교사로 근무하던 한 여자의 서류를 필사적으로 찾아낸다. 얼핏 스릴러 소설의 한 장면 같다. 그녀의 서류에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 실은 아무것도 없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그에게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그리고 이 '아무것도 아님'이야말로 그가 그녀에게 이끌리는 이유이다.

구글에 <모든 이름들>을 검색한다면 놀랄 정도로 정보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그래도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쓴 작가인데 이렇게 인지도가 없어도 되나?' 순간 의아했지만 이 책이 한국에서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팔린다는 것을 알고 납득했다. 이 이름으로 검색한다면 훨씬 많은 인기를 체감할 수 있다. 애초에 <눈 먼 자들의 도시>와는 하등 관련도 없는 내용의 책이지만... 뭐 작가만 책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작가 특유의 대화문은 여전히 신선하다. 한 번만 눈을 떼도 흐름을 놓쳐버릴 듯한 핑퐁같다고 할까. 지독하게 고유명사를 쓰지 않는 특징 또한 이 소설의 주제와 절묘하게 결합되어 해석의 여지를 풍부하게 한다. 어쩌면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란 이름은 좋은 이름일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이름을 부여 받은 주인공 쥬제, 이름 모를 소장, 부소장, 말단 직원들... 그리고 살아있는 이름과 죽어있는 이름들의 무덤인 등기소에서 쥬제씨가 찾아낸 '미지의 여인'.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건전한 스릴러'라고 하고 싶다. 진실(?)을 찾아내려 애를 쓰는 주인공, 직장 상사의 숨막히는(?) 추궁,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잠입 장면, 결말에 드러나는 충격적인(?) 반전.... 이것만 보니 정말로 대단한 음모라도 숨어있는 것 같은데.

실은 주인공이 찾는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소설 자체는 결국 쥬제씨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타인들, 그리고 내면의 자신과의 핑퐁 같은 대화가 주가 된다.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아무것도 아님'을 공 삼아서 치는 탁구 같은 대화.

말할 만한 내용이 더 많은 책이지만 쥬제씨의 '탁구 기록' 한 부분을 올리고 이만 줄인다.

죽음은 신성한 겁니다, 이보게 서기원 양반, 신성한 건 삶이야. (p.215)

'~겁니다,' 까지 쥬제씨의 서브, '이보게~' 부터 다른 인물의 리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