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폭로, 한국판 미투운동 필요하다
▲영화 <밀양> 스틸 컷ⓒ 시네마서비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용서를 할 수가 있어요."
영화 <밀양> 속 전도연이 연기한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면회하고 와서부터 정신을 놓기 시작한다. 범인은 온화한 얼굴로 "하나님에게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라며 신애에게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동의를 구한다.
가해자에게는 별다른 말도 못하고 면회실을 나온 신애는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의 뜻' 운운하며 신애를 다독이던 교회 신자들에게 위와 같이 호소하며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 피해자는 끝없이 고통받고 있는데 누굴 용서하고 누구에게 회개 받고, 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가. 영화 <밀양>은 이렇게 이창준 작가의 <벌레이야기>를 경유해 '셀프 회개' 운운하는 가해자들의 논리와 피해자들의 고통을 깊이 있게 영상화한 작품이었다.
"가해자가 최근에 종교에 귀의를 해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서지현 검사가 29일 <뉴스룸> 인터뷰에 나선 두 번째 이유를 듣는 순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저 유명한 전도연의 대사와 면회 장면을 떠올린 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맞다. 현실판 <밀양>의 범인이자 가해자가 출현했다고 할까. 그리고, 8년 전 검찰 간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백한 서 검사가 인터뷰에 나선 나머지 이유는 이랬다.
"첫째는 저는 제가 성실히 근무만 하면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고 당당하게 근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검찰 조직의 개혁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절대 스스로 개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요(중략). 세 번째는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범죄 피해자나 성폭력 피해자는 절대 그 피해를 입은 본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서지현 창원지검 검사는 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검찰 내 성추행 사건에 대해 폭로했다.ⓒ JTBC
현직 여검사의 성폭력 고발이 가져온 파장
<뉴스룸> 인터뷰 직후, 온라인과 소셜미디어는 충격으로 뒤덮였다. 현직 여성 검사도 성폭력 피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내부 고발까지 8년이나 걸렸다는 점, 그 기간 동안 각종 인사 불이익에 시달렸다는 점, 더군다나 가해자와 그 배후 고위 인사들은 조직 내에서 권력을 누리고 승승장구했다는 점 등 '경악'할 만한 요인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앞서 이날 창원지검 통영지청 소속 서지현 검사는 29일 검찰 내부통신망인 '이프로스'에 글을 올려 8년 전인 2010년 10월 30일 한 장례식장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서 검사는 당시 법무부장관을 수행했던 법무부 간부 안 모 전 검사가 "옆자리에 앉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엉덩이를 쓰다듬는 행위를 상당 시간 지속하는 강제 추행"을 했고, 장례식장 안에 있던 동료 검사들 여럿이 이 추행 행위를 목격했다고 설명했다.
"지금 사실은 처음부터 말씀을 잘 잇고 계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다음 질문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다음 질문이 사실 저도 드리기 싫은 질문이기 때문에요. 2010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손석희 앵커)
서 검사와 마주 앉아 질문을 던지는 손석희 앵커도, 그를 지켜보는 시청자도 당혹스럽고 참담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반면 서지현 검사는 부러 논리적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분노와 울분을 삼키면서도 또박또박 사건의 진상과 그간의 경과, 자신이 내부 고발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서 검사가 18분여에 걸친 인터뷰 초반, 맨 앞에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주위에서 피해자가 직접 나가서 이야기를 해야만 너의 진실성에 무게를 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서요. 그 이야기에 용기를 얻어서 이렇게 나오게 되었고요. 또 제가 사실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사실 제가 범죄의 피해를 입었고 또 성폭력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거의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닌가….
'굉장히 내가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했구나'라는 자책감에 괴로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와서 범죄 피해자분들께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분들께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제가 그것을 깨닫는 데 8년이 걸렸습니다."
▲서지현 창원지검 검사는 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검찰 내 성추행 사건에 대해 폭로했다.ⓒ JTBC
용기 있는 폭로, 한국판 '미투' 운동 다시 불 붙기를
"범죄 피해자나 성폭력 피해자는 절대 그 피해를 입은 본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서 검사는 곧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과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검사직을 걸고 내부 고발과 언론 인터뷰에 나서는 용기를 낸 이유로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건 '검사'이자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꽃뱀'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해야 하는 한국사회의 불합리와 남성권력, 그리고 물리적·심리적 폭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여성들의 공고한 연대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장면이었다.
"오늘 올리신 글 중에 좀 충격적인 내용이, 이걸 옮겨도 될지 모르겠지만 '성추행 사실을 문제 삼는 여검사에게 잘나가는 검사의 발목을 잡는 꽃뱀이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자주 봤다', 진짜로 이렇게 들으셨습니까?" (손석희 앵커)
"네, 실제 들었습니다. 성폭력이라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성폭행이 있고요. 성폭행은 강간을 의미합니다. 성추행은 강제추행을 의미하고요. 성희롱이라는 것은 언어적인 어떤 성폭력을 얘기합니다. 그렇게 세 가지인데요. 성추행, 성희롱뿐만 아니라 사실은 성폭행도 이루어진 적이 있으나 전부 비밀리에 덮고…." (서지현 검사)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에서 실제로 성폭행까지 벌어졌고, 피해자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서 검사는 "여검사들에게 '남자 검사들 발목잡는 꽃뱀이다' 이런 이야기는 굉장히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폭로하기도 했다. 역시나 손석희 앵커도, 시청자들도 경악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그러한 경악은 인터뷰가 나간 뒤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가해자로 밝혀진 안 모 전 검사가 유명 대형 교회에서 '간증'을 하는 동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됐고, 또 그가 검찰 돈 봉투 논란으로 면직 처분을 받은 그 '검사'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의 배후에 있었었다는 검찰 간부의 실명까지 공개되면서 검찰 조직의 신뢰는 다시 한 번 땅에 떨어지게 됐다.
"상관에게 성폭행 당한 여군은 자살했고 그 아버지가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 더 많은 숨은 피해자에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어떤 조직이든 자유롭지 못합니다. 권력으로 약자를 유린한 범죄, 부끄러운 것은 가해자 당당해야 할 사람은 피해자. #metoo 동참하시는 분들을 응원합니다."
방송 직후, 표창원 의원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이다. 이렇게 남녀불문 서 검사를 응원하는 여성들을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이 한국판 '미투' 운동에 동참하는 중이다. 미투 운동은 지난해 미국의 유명 영화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추문 논란 이후 전세계로 퍼져 나간 성폭력 고발과 성폭력 반대 운동이다.
더 이상 피해자들만 고통받고, 가해자들은 '셀프 회개', '셀프 용서'를 구하는 <밀양>과 같은 아이러니와 모순이 지속되면 안 된다. 피해자들에게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주기 위해 용기를 낸 서지현 검사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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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서검사님 덕분에 한국 미투 운동에도 불이 훨훨 타고 있어요.
좋은 뉴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