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3779 : 나의 핀 홀 안경과 [이제 알았다! 라는 견해}
나는 요사이 이 안경을 쓰고 오솔길을 따라 30분간의 출근길을 걷고, 역시
30분간의 퇴근 길을 걸어간다. 원래는 컴퓨터 앞에서만 쓰는 안경이라고 했지만 내겐 최고의 수행도구이다.
사진과는 달리 내 안경에는 7개의 구멍만이 좌우로 뚫려있다. 두 개의 7개
의 구멍이 초점을 맞우면 나는 7개의 구멍을 통해 앞을 보고 걷는다. 그러
나 나는 안다. 내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 나무 강아지등이 단지 내 눈에 그렇
게 남자, 여자, 연세 드신 분, 멋쟁이, 은퇴자, 주부, 슈바이저, 진돗개 등으
로 보일 뿐 그렇게 내 안경을 통해 내가 인식하는 존재들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개나리도 소나무도 산수유도 철쭉도 그건 전부 내 생각이
며 내 인식이며 세상의 판단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의 이름과 상은 모두 7개의 구멍을 통해 나에게 인식되는, 즉 [관찰자]
인 내 입장에서 그렇게 이름과 이미지가 정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모든 상과 이름을 [범소유상, 개시허망]임을 알기에, 나의 안경을 통
해 보여지는 모든 상들이 약견제상비상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그 구멍에 잡히지 않지만 나의 좌 우 그리고 저 하늘 땅밑의
모든 존재들 7개의 구멍외에는 아무런 관찰자가 없기에 입자가 아닌 파동으
로 존재하는 오행(五行)의 바다, 지수(地水)화풍(火風)의 바다의 모든 존재가
여래임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즉견여래]의 ‘주위를 잡고 있는 상태’에서
걷는다. 이렇게 세상과 주위를 인식하는 것을 [참된 인식]이라고 한다.
‘페테르 에르베’를 통해 금강경 31분 지견 불생분의 낙처를 공부해보자.
알다시피 [참된 인식]은 참된 나, 내 안의 여래, ‘참 나’에 좌우된다. [참된 인식[이라는 새 신발을 처음 신을 때는 약간 삐끗거릴 수도 있지만, 몇 걸음 더 걷고 나면 우리는 발레 자세까지 취해가면서 확신을 갖는다. 세상을 뒤흔들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는 이제 문을 열고 복잡한 세상 속으로 걸어나간다. 그런데 휙! 순식간에 새 신발이 벗겨지고 만다. 신발이 우리에게 너무 크거나 우리가 신발에 비해 너무 작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어쨌든 그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세세 생생 그렇게 살아왔던 육신의 거짓자기는 잽싸게 신발을 비난하고 나서지만,
우리는 그런 술책 정도는 꿰뚫어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쌓여 있는 집안일을 내버려두고 다시 걷기를 시도해 본다. 이번에는 발에 물집이 생긴다. 신발에 비해서 우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우리는 의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거짓자기라면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다. 거짓자기가 영적 자부심의 놀이로 우리를 우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발을 벗고 상처를 어루만진 후 잠시 빈약한 식사를 한다.
그러다 깨달음을 얻은 우리는 다시 한번 시도한다.
이번에는 아무리 사나운 태풍이라도 우리 신발을 벗길 수 없다는 걸 안다.
이제 우리의 걸음에는 탄력이 붙고, 그 신발을 신고 엉겅퀴도 지나고 불길도 지나간다.
우리는 얼마나 강력한 신발을 가졌는가!
이 신발만 있으면 우리는 어떤 공격도 망각 속으로 차버릴 수 있다.
그래서 원치 않는 기회들이 왔을 때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발가락이 부러지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신발을 벗어서 안 보이는 구석 쪽에 던져둔다.
뼈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다시 한번 초라한 식사를 하면서 운명을 한탄한다.
우리는 사기당하고 속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소유할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한다. 참 나의 힘은 그냥 존재하고, 앞에서 말했듯이 떠오르는 태양은 밤과 싸우지 않는다. 존재만으로도 밤은 영광스러운 새날로 바뀐다. 우리는 [참된 인식]의 이해 뒤에 놓인 장엄한 진리를 깨닫기 시작 한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최대의 힘이라는 진리를. 그래서 우리는 맨발로 걷는 것을 배운다. 나의 여래가 존재한다면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으니, 나는 검과 방패를 내려놓고 발가벗은 채 나의 참 나, 나의 여래에 세상 모든 여래의 오행의 바다에 참여 한다.
知見不生分 第三十一
지 견 불 생 분 제 삼 십 이
須菩提야 若人이 言하대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라 하면
수 보 리 약 인 언 불 설 아 견 인 견 중 생 견 수 자 견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是人이 解我所說義不아
수 보 리 어 의 운 하 시 인 해 아 소 설 의 부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是人이 不解如來所說義니
불 야 세 존 시 인 불 해 여 래 소 설 의
何以故오 世尊이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은
하 이 고 세 존 설 아 견 인 견 중 생 견 수 자 견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니이다
즉 비 아 견 인 견 중 생 견 수 자 견 시 명 아 견 인 견 중 생 견 수 자 견
須菩提야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於一切法에
수 보 리 발 아 뇩 다 라 삼 먁 삼 보 제 심 자 어 일 체 법
應如是知하며 如是見하며 如是信解하야 不生法相이니
응 여 시 지 여 시 견 여 시 신 해 불 생 법 상
須菩提야 所言法相者는 如來가 說卽非法相일새 是名法相이니라
수 보 리 소 언 법 상 자 여 래 설 즉 비 법 상 시 명 법 상
제31분 지견을 일이키지 아니함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아견 ․ 인견 ․ 중생견 ․ 수자견을 살하셨다’한다면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바 뜻을 이해하였다 하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설한 바 뜻을 이해하지 못 하였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아견 ․ 인견 ․ 중생견 ․ 수자견은 곧 아견 ․ 인견 ․ 중생견 ․ 수자견이 아니옵고, 아견 ․ 인견 ․ 중생견 ․ 수자견이라 이름만 붙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發한 사람은 일체의 법에 응당 이롸 같이 알며, 이와 같니 보며, 이와같이 믿고 이해하여, 법상法相을 일이키지 않나니, 수보리야, 이른 바 법상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가 설한 즉 곧 법상이 아니요, 법상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