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스타트, 사이클, 그리고 빙상연맹

in #mass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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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트맘의 폭로…“우리 아들은 이승훈의 ‘탱크’였다”' 제하의 <서울신문> 기사(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226500097)는 금메달을 위해 다른 선수가 희생하는 스케이트 국가대표팀의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의미가 없지 않지만,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기사인지는 의문이다. 기사에서 언급한 '탱크' 작전은 일등 한명을 위해 나머지 선수가 헌신하고 희생하는 방식을 가리키는데,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스포츠는 매스스타트만 있는 게 아니다.

매스스타트는 사이클 레이스와 유사하다. 많은 로드바이크 동호인들이 동계올림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건 투르드프랑스 같은 장거리 야외 경주를 가리킨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프로 스포츠 이벤트 중 하나인 월드투어 사이클 레이스에서, 선수들은 팀으로 참여해 같은 유니폼을 입고 다양한 작전을 구사하게 된다.

팀들끼리 경쟁하지만 우승자는 개인 한명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머지 팀원들이 희생하는 구도가 연출된다. 팀의 한 사람이 결승선에 제일 먼저 도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사이클 팀의 목표다.

사이클 경기 특성상 바람, 즉 공기저항이 끼치는 영향은 ‘결정적’이다. 단적으로 말해 자전거 경주는 바람과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팀의 선수들은 에이스 앞과 옆에 붙어 ‘바람막이’가 된다. 에이스가 사고나 낙차 등으로 선두그룹이나 펠로톤(대규모로 뭉쳐서 달리는 집단)에서 뒤쳐지는 경우, 도움선수가 에이스 앞에서 끌어주며 유리한 포지션까지 에이스를 ‘배달’한다. 만약 에이스의 자전거에 문제가 생기면, 도움선수들 중 가장 가까운 이가 지체없이 자신의 자전거나 휠을 내주고, 때에 따라 보급식량과 물까지 에이스에게 전부 넘겨준다. 사이클은 헌신과 희생과 고통의 스포츠다. 그래서 더 감동적인 것이고.

에이스의 기량이 아무리 출중해도 동료의 협력이 없으면 우승은 불가능하다. 에이스를 돕는 도움선수를 흔히 도메스티크 또는 리드아웃맨이라 부른다. 특히 리드아웃맨은 스프린트 경기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를 악물고 에이스를 끌어주다가 결승선 바로 앞에서 연료를 소진하고 장렬히 산화한다. 힘을 아끼던 에이스는 그때부터 부스터를 점화하며 치고나가 다른 팀 에이스와 우승을 다투게 된다.

사이클 역사에서 위대한 챔피언에게는 늘 위대한 도움선수가 있었다. 그리고 도움선수였다가 위대한 챔피언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크리스토퍼 프룸은 당시 영국 사이클의 자존심이던 브래들리 위긴스가 투르드프랑스에서 염원하던 우승을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도메스티크였다. 기량이 완숙해지면서 프룸은 레이스 도중 야심을 드러내며 팀 지시를 어기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에이스 위긴스와도 갈등이 생기고 팀 내부 긴장도 높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룸은 남았지만 위긴스는 팀을 떠나야 했다. 에이스가 교체된 것이다. 이후 투르드프랑스 4회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는 등 프룸은 위긴스를 뛰어넘어 영국 역사상 최강의 선수로 성장했다. 한편 2010년대 본격화된 프룸의 전성기를 받쳐준 최대의 조력자는 미켈 란다라는 당대 최고의 도움선수였다. 란다는 최근 도메스티크가 아닌 챔피언이 되기 위해 프룸의 팀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도움선수로 만족하는 선수는 없다. 누구나 에이스, 챔피언이 되고 싶어 한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조력자로 활동했지만 만약 에이스의 기량이 예전같지 않고 내 실력이 더 낫다고 느끼게 되면 자기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기 마련이다. 팀내에서 인정받아 에이스가 교체되는 ‘평화적 정권교체’도 없지는 않지만 역시 이미 자리잡은 돌은 빼내기 쉽지 않다. 다른 팀으로 가서 실력을 증명하고 명실상부한 챔피언이자 에이스로 거듭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물론 도움선수로 일류였지만 에이스가 되어서는 끝내 챔피언이 되지 못한 사례도 허다하다.

실내경기라 좀 덜하단 차이는 있지만 공기저항에 영향을 받는 점에서 매스스타트나 사이클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에이스가 동료의 헌신으로 힘을 비축하고 승부처에서 단번에 결정짓는 형태의 전략이 유효하다. 따라서 매스스타트 경기에서 선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비난하긴 어렵다는 생각이다. 경기의 성격이 그러하기 때문에 비난하려면 경기 방식 자체를 비난해야 한다. 서울신문 기사는 그런 면에서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미켈 란다는 기꺼이 수년간 프룸의 도움선수로 희생했지만, 자신이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자 몸값을 높여 다른 팀으로 옮길 수 있었다. 프룸을 포함한 팀 동료들은 아쉬워하긴 했어도 미켈 란다의 선택을 따뜻하게 격려하고 응원해줬다. 그러나 특정 세력이 장악한 국가대표팀에서는 그런 장면이 불가능하다. 안현수처럼 다른 나라로 귀화하는 게 사실상 유일한 대안이다.

다른 대다수의 경주들처럼, 사이클 레이스 역시 패자에게 가혹하다. 스폿라이트는 우승자에게 집중된다. 성적지상주의도 만연해 있고, 그에 따른 도핑 문제도 여전히 심각하다. 하지만 금메달이란 결과에만 목을 매는 한국 빙상 국대팀과는 달리, 프로 사이클 레이스는 우승자가 우승하기까지의 과정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관련단체, 선수, 업계 언론, 팬 모두가 '팀 스포츠'로서 도로자전거 경기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사이클은 우승 상금을 팀원 전원이 N분의 1로 공평하게 나누는 게 관례인 스포츠이고, 도메스티크에게도 명예가 확실히 주어지는 생태계다. 미켈 란다는 큰 대회 우승경력이 적지만 일류 도메스티크로 존중받았으며, 팀에서도 확고한 입지를 갖고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 못따면 선수생명을 위협받는 한국 빙상 대표팀에서는 미켈 란다 같은 선수가 나오기 어렵다.

사이클과 빙상 종목은 시장규모가 다르다. 그럼에도 한국 빙상 대표팀의 문제를 단지 '시장의 규모' 문제로 환원할 수는 없다. 사이클 레이스는 관련 산업의 크기나 유명세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영세한 스포츠다. 극소수 팀을 제외하면 일년 앞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이 열악하며, 프로 사이클팀이 어지간한 아마추어 축구팀이나 실업 야구팀보다 돈이 없는 경우도 흔하다. 사이클만으로 먹고 사는 선수도 드물다. 대개는 따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대회에 출전한다. 나는 한국 빙상 대표팀 문제가 성적지상주의'에만' 기인한다 보지도 않는다. 한국 양궁 국가대표팀 역시 철저한 성적지상주의로 운영되어 왔지만 빙상연맹처럼 혼탁하지는 않다(고 알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에이스와 희생하는 선수로 역할이 분담되는 상황이 아니라, 그 분담 과정이 공정하고 합리적인가이다. 현시점의 경기력으로 팀내 역할이 투명하게 결정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팀의 역량을 높은 상태로 유지하며 세대교체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희생한 선수에게 어떻게 보상하고 또 에이스 도전 기회를 부여할 것인가? 우리가 고민해야 할 일은 이런 종류의 질문이 아닐까. (노파심에 덧붙여두자면, 이런 '능력주의적 강박'은 스포츠 영역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데엔 이유가 있다. 분명 한국 빙상연맹이란 생태계에는 특유의 조직구조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파벨라 동인]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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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문제를 보는 또 다른 관점에 수긍이 갑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같은 말 하는 거 같은데요?
페이스메이커를 쓰는 방식 자체가 아니라 과정에서 부당함과 몰아주기 같은거요. 페이스메이커 자체를 문제로 보는게 아니라 그래서 희생이라고 쓴 거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인터뷰가 가짜라는 얘기도 나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