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반추反芻 (11)

in #novel7 years ago (edited)



반추反芻 (11) - 태식이 형 태근이와 문희의 사연

“태식아!”
거실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희는 옷을 가다듬고 눈물을 닦아 내었다. 태식이 문을 열고 나가자 형 태식이 와 있었다.
“형 왔어?”
“너, 여자 친구 데려 왔다며?”
“응, 그냥. 어머니 아버지께 인사나 시키려고.”
그때, 태식의 방에서 문희가 거실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나온 문희에게 태근은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해 주었다. 문희는 인사를 한 태근을 향해 말없이 목례를 할 뿐이었다.
“잘 오셨어요. 제가 태식이 둘째 형입니…”
순간, 고개를 든 문희를 바라본 태근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S전자 지점 C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는 태근은 얼마 전 문희와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문희는 3년 전, 물리 치료를 받았던 오빠의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C은행에서 500만원을 대출 받았고 상환기일이 훨씬 지난 지금도 원자는커녕 이자조차로 제대로 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C은행에서는 최종통보 후 법적절차를 밟아 문희의 월급에 압류 조치를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곳저곳으로 형편에 따라 이사 다녀야 했던 문희는 월급이 압류가 되기까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달 전, 월급을 받은 문희는 깜짝 놀랐다. 월급의 절반만이 봉투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문희는 그제야 은행의 대출계를 찾아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태근은 그때 대출계를 담당하는 은행원으로 문희와 상담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때 문희는 은행창구에 찾아 가 사정을 했지만 대출금을 전액 상환하기 전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음을 태근에게 듣고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상담창구 앞에 앉아 일어설 줄 모르고 한동안 멍하니 태근을 보며 울고 있었다. 그것을 그 문희의 모습을 태근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근을 바라보던 문희도 한동안 얼어붙은 듯 굳어 있었다.
“형, 왜 그래?”
“아는 사이냐?”
태근과 문희를 번갈아 쳐다보던 아버지가 이상했던지 태근에게 물었다.
“아, 아뇨. 전 그냥 예전에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아서 놀랐는데 제가 잘못 본 것 같아요. 워낙 미인이셔서 그런지 낯설지 않아서요.”
“실없는 놈.”
문희는 얼굴이 창백해 졌다. 태식은 태근이 형을 본 후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며 당황해하는 문희를 보자 직감적으로 형과 문희가 알고 있는 사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 먹고 가.”
어머니는 가만히 서 있는 문희의 손을 잡으며 저녁을 먹고 가라고 권유했다.
“죄송합니다.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일이 있었서…”
“아, 맞아 내가 깜빡했네. 오늘 어머니 시골가시고 안 계신다고 했잖아! 빨리 가서 오빠 식사 챙겨 드려야 하는데. 어머니! 문희씨가 오늘 저녁식사는 못하고 그냥 인사만 드리고 갈 거라고 미리 말씀드려 달라고 했는데 제가 깜빡했네요. 죄송해요.”
사전에 문희와 이야기된 사항은 아니었지만 태식은 어머니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어쩌나 밥 다 해놨는데… 오빠 하루쯤은 그냥 식당에서 사 먹으라고 하면 되겠구만…”
문희의 사정을 알 수 없었던 어머니는 무척 섭섭해 했다.
“오빠가 워낙 대쪽 같은 분이라 밤늦게 들어가면 혼나요. 오늘 오빠에게는 미처 말하지 못하고 왔거든요.”
“야 이놈아! 니가 문희 대변인이냐? 하긴 벌써 시간이 8시가 다 되었네. 어쩌나 섭섭해서…”
“할 수 없지, 다음에 오면 꼭 식사하고 가요.”
어머니의 퉁명스러운 소리에 아버지가 문희를 보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그래그래, 자주 놀러와.”
어머니는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문희에게 자주 놀러 오라는 말을 했고 태식은 문희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함께 따라 나섰다.
“안녕히 가세요.”
뒤에 서 있던 태근이 형이 겸언쩍게 문희의 등 뒤에서 인사를 했다.
“아참, 형? 잠깐만 나 봐봐!”
“왜?”
마당으로 나가는 문희를 돌아보며 태식이 형에게 말했다.
“나, 돈 좀 빌려줘 내일 줄게. 기름을 넣어야 하는데 돈을 찾지 못했어.”
“녀석, 데이트하느라 정신이 없구나.”
어머니와 아버지가 문희를 따라 나가는 것을 보며 태식은 뒷주머니에서 꺼내고 있는 형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형, 어머니 아버지께 아무것도 말하지 마. 알았지?”
“뭘?”
“알면서 뭘 그래, 아무튼 말하지 마. 나중에 이야기해.”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내미는 태근의 형에게 됐다는 듯이 태식은 형의 손을 붙잡고 황급히 마당으로 나갔다.
“야! 태식아?”
등 뒤에서 태근이 형이 불렀지만 태식은 형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머니 다녀올게요.”
“그래, 잘 데려다주고 와라.”
문희와 태식은 대문을 나섰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문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태식은 불안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고 지금 문희의 마음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랐다.
“괜찮아?”
“……”
“너무 마음 쓰지 마! 다행히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문희씨가 무척 마음에 드신 것 같았어.”
위로를 했음에도 문희는 정면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태식은 더 이상 문희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문희는 지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인 것 같았다. 태식은 가만히 문희의 손을 잡았다. 문희는 태식의 손이 자신의 손등에 닿자 태식의 손을 힘주어 꼭 잡았다. 그리고는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채 창밖 거리의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태식은 문희가 자신의 손을 먼저 힘주어 잡아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그것은 태식으로서는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함께 하겠다는 무언의 결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화안동 문희의 집에 도착하기까지 두 사람은 간혹 손을 붙잡았다 놓았다 반복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오늘은 그냥 집에 가요.”
집 앞 골목에서 내린 문희는 차 문짝을 잡은 채 고개를 숙여 운전석에 있는 태식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래, 마음 풀어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문희는 애써 빙긋 웃어 보였다. 태식도 문희를 보며 웃어 주었다.
태식은 차 앞 유리로 보이는 문희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골목으로 꺾어지며 문희는 돌아서서 두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그녀의 어깨에 매달린 핸드백이 손을 흔들수록 그녀의 가는 허리를 때리고 있었다. 문희의 모습이 골목으로 사라진 후에도 태식은 차를 출발시키지 않은 채 골목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머릿속에는 양 팔을 흔들던 문희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