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5 [한국학 에세이] 03 "단전성(丹田性) 문화②"
"단전성(丹田性) 문화②"
➲ 단전성 문화란?
한국문화의 특징이 ‘단전성 문화’라고 한다면 ‘단전성’의 문화 특징은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하나하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전(丹田)’의 사전적 의미는 심신(心身)의 정기가 모이는 곳으로 생명력과 활동력의 원천이 되는 장소를 말한다.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모든 경락이 모이고 원기(元氣)를 저장하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고, 도교에서는 정(精)·기(氣)·신(神)의 원활한 흐름이 상·중·하의 단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즉 단전은 모든 생명력의 중심이 되는 요체, 핵심, 센터의 특징을 갖는다고 하겠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도 삼매의 체험과정에서 ‘인간내면에 잠재된 근원적 에너지’인 ‘쿤달리니’를 각성한다고 했는데 그 중심장소를 ‘차크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차크라’가 바로 우리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단전’과 동일한 것이다.
비유해 보자면 고속도로를 통해 서울로 들어올 때 모든 차량이 만남의 광장 톨게이트에서 한 번 모였다가 지나가게 되듯이 우리 인체의 모든 기운도 이 단전이라는 핵심 지점(spot)을 통해서 드나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가 단전성 문화라는 것은 지구상의 모든 사상·철학·종교·문화의 현상들이 이 한반도라는 하나의 장(場, field)에 모여들고 결집되며 응축되고 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 곳에 모여서 집중이 되면 요약되고 결론이 나는 속성이 생긴다. 그로 인해서 다시금 새롭게 창조하는 힘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역학적(易學的)으로 동북방인 ‘간방(艮方)’에 위치하는데 그 의미를 <주역>에서는 ‘시만물종만물(始萬物終萬物)’이라 하여 ‘만물을 시작하고 만물의 결론을 맺는다’고 풀이하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 땅에 대해서 결론을 맺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장소로 인식해 왔던 것이다.
➲ 결론적 불교와 유교 ‘한국학 특징’
육당 최남선은 1930년 태평양 불교학자대회에서 ‘조선불교-동방문화사상에 있는 그 지위’라는 글에서 “인도불교를 서론적 불교, 중국불교를 각론적 불교, 한국불교를 결론적 불교”라고 설파한 바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었으니 서론이라 할 만하고, 중국에서 13개 종파불교가 펼쳐졌으니 본론이라 할 만하다.
우리 한국불교는 인도와 중국에서 펼쳐진 모든 불교의 이론과 실천을 원만히 갖추고 종파를 초월한 통불교인 결론적 불교를 건립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원효라는 것이 육당의 주장이었다.
필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효만이 그러했던 것이 아니었으며, 불교만이 그러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역설하고자 한다. 한국불교사를 깊이 연구해 보면 이 땅의 고승대덕 가운데 불교의 각 분야에서 결론을 제시한 이가 부지기수임을 발견하게 되고, 한국유학사상사에서도 역시 한국불교처럼 결론적 특성이 나타남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원효와 의상은 신라불교의 결론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고, 한국유교를 대표하는 퇴계와 율곡은 조선유학의 결론적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 원효와 율곡
원효(元曉, 617~686)는 자신의 저작에 ‘종요(宗要)’라는 제목을 붙인 경우가 많았다. <법화경종요>, <열반경종요>, <대혜도경종요>처럼 각 경전의 종지(宗旨)를 요약(要約)한 것이다. 그의 활달한 문장력은 단순한 주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핵심을 요약하고 진여를 곧장 드러내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기존의 교리논쟁을 화쟁(和諍)과 회통(會通)의 방식으로 융회시켜서 논란과 담론을 일축하고 일심(一心)이라는 결론을 제시해 준 독특한 글쓰기를 인류지성사에 남겨주었다.
근대 한국철학계의 제1세대인 박종홍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철학사>의 첫머리에서 “한인(韓人)의 철학적 사색능력은 먼저 불교사상의 획기적 전개로부터 발휘되기 시작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즉 한국철학사의 문을 연 것은 다름 아닌 불교사상이라는 것이다.
한국불교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국의 정신문명을 이해할 수 없다. 한국불교는 한국사상의 근원이요, 원효는 한국사상사의 새벽이다. 원효가 선택한 저술의 방식이 바로 핵심을 요약하는 ‘종요’라는 방식의 글쓰기였다.
율곡(栗谷, 1536~1584)은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3년 상을 모신 뒤에 인생의 무상을 절감하고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교경전과 참선수행이라는 귀한 체험을 한 뒤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인생의 이정표를 새롭게 정립하고 하산했다.
그는 조선 최고의 천재로서 생원·진사과에서 대과와 별시까지 총 아홉 번을 장원으로 급제한 조선유일의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었다. 20대에 도산으로 퇴계를 찾아갔던 율곡은 퇴계로 하여금 ‘뒤에 태어나는 이가 두려워할 만하다’는 ‘후생가외(後生可畏)’의 감탄을 자아내게 할 만큼 빼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40세 되던 해에 유학의 요점을 모아 정리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율곡은 이 한 권의 책으로 유학사상 전체를 요약해 내고 있는데 동아시아의 유교사상사 전체에서 성리학을 이보다 잘 정리한 교재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역대의 평가이다. 율곡이 선택한 ‘집요(輯要)’의 저작방법은 원효의 ‘종요(宗要)’의 글쓰기와 정확히 오버랩된다.
➲ 의상과 퇴계
의상(義湘, 625~702)은 방대한 화엄학의 세계를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라는 그림 하나와 ‘법성게(法性偈)’라는 210자의 게송하나로 정리해 놓았다. 중국의 화엄사상사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의상만큼 화엄학의 종지를 명료하게 요약해 놓은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겉으로 보기엔 당나라의 지엄(智儼)에서 법장(法藏)으로 화엄종의 법맥이 이어진 것 같으나 실상은 의상에 이르러서 비로소 <화엄경>이 그 핵심이 응축되고 일승원교가 일단락을 한 번 맺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연(一然)은 <삼국유사>에서 의상의 경지는 법계도와 법성게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의미로 “한 솥의 국맛은 고기 한 점만 먹어보아도 충분하다(嘗鼎味 一臠足矣)”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림 하나로 그 넓은 일승화엄의 세계를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니 가히 화엄학의 결론이라 할 만하다.
한국유교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퇴계(退溪, 1501~1570)는 그림 열 장으로 성리학의 핵심사상을 요약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학십도(聖學十圖)>이다. 17세에 갑자기 왕위에 오른 선조를 위해 열 폭의 병풍을 만들어 항상 곁에 두고 유학의 핵심을 공부할 수 있도록 그려준 이 그림에서 퇴계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성학십도>를 보면 복잡한 성리학 전체의 체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중국의 양계초(梁啓超)는 ‘퇴계선생 성학십도찬시(退溪先生 聖學十圖讚詩)’에서 “높고 높은 이부자(李夫子)께서 성리학의 요결(要訣)을 전하시어 백세(百世)에 길이길이 인심(人心)을 열어주셨다”고 극찬했다. 동아시아 성리학의 학술체계는 퇴계의 <성학십도>를 통해 한번 결론을 맺게 된 것이다.
➲ ‘요’ㆍ‘도’로 불교와 유교 요약
원효와 율곡은 ‘요(要)’의 방식으로, 의상과 퇴계는 ‘도(圖)’의 방식으로 불교와 유교의 핵심을 요약했다. 요약은 분량이 작아지는 대신에 그 핵심이 모두 담기는 것을 의미한다. 땅덩이는 작으나 모든 요소 갖추고 있는 지구의 단전인 이를 한국 땅에서는 불교든 유교든 한번 들어오면 그 결론을 맺게 된다.
‘도(圖)’·‘요(要)’를 통한 결론짓기가 바로 단전성(丹田性) 문화의 한 증거이자 한국학의 한 특질이 된다. 일제가 한국사상에 독창성이 결여되었다는 식의 식민사관을 제시한 바 있지만, 우리는 ‘결론적 불교’와 ‘결론적 유교’라는 ‘단전성 문화’로 이 논란을 잠재워주면 될 것이다.
출처 : 불교신문 / 2020.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