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3(월)역사단편245. 역사2
단재는 김부식이 역사책을 쓰면서
무성의와 편견에 사로잡혀
역사에 죄를 지었음을 지적했다.
왜 그렇게 단정할 수 있었을까?
김부식이 작성한 삼국의 연대표를 본다.
수십년으로 단명한 대륙의 왕조들에 등장한 왕을
황제라 칭하면서 그들의 연호를 기준으로 했다.
삼국의 왕은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쌓아도
전부 왕이라고 적었다.
何故(하고)인가 하면, 金富軾(김부식)의 理想的 朝鮮史(이상적조선사)는
(一) 朝鮮의 疆土(조선의 강토)를 바싹 줄여
大同江 或 漢江(대동강 혹 한강)으로 國境을 定(국경을 정)하고,
(二) 朝鮮(조선)의 制度·文物·風俗·習慣 等(제도,문물, 풍속, 습관등)을
모두 儒敎化(유교화)하여
三綱五倫의 敎育(삼강오륜의 교육)이나 받고,
(三) 그런 뒤에 政治(정치)란 것은
오직 外國에 使臣(외국에 사신) 다닐 만한
卑劣(비열)한 外交의 辭令(외교의 사령)이나 堪任(감임)할 人을 養成(양성)하여
東方君子國(동방군자국)의 稱號나 維持(칭호나 유지)하려 함이다.
그러나 金富軾 以前(김부식 이전)에 朝鮮史(조선사)는
거의 金富軾의 理想(김부식의 이상)과 背馳(배치)되어
疆土(강토)는 遼河(요하)를 건너 東蒙古까지 連接(동몽고까지 연접)한 때가 있으며,
社會(사회)는 郞家(낭가)의 宗敎的 武士風(종교적 무사풍)을 받아
孔·孟의 遺訓(공, 맹의 유훈)과 다른 方面(방면)이 많으며,
政治界(정치계)에는 往往(왕왕)
廣開土王(광개토왕), 東城大王(동성대왕), 眞興大王(진흥대왕),
沙法名(사법명),乙支文德(을지문덕), 淵蓋蘇文(연개소문) 같이
外國과 挑戰(외국과 도전)하는 人物이 間出(간출)하여
金富軾의 頭痛(김부식의 두통)꺼리가 一二三(일이삼) 뿐만이 아니더니,
이제 千載一時(천재일시)로 西京戰 後에 勝利(서경전후에 승리)한 뒤를
機會(기회)삼아 그 事大主義를 根據(사대주의를 근거)하여
『三國史記삼국사기』를 作(작)할 때,
그 主義에 合(주의에 합)하는 史料(사료)는 敷演讚嘆 或 改作(부연찬탄 혹 개작)하며
不合하는 史料(부합하는 사료)는 論貶塗改 或 刪除(논폄도개 혹 산제)하였다.
< 출처: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辭令(사령): 남을 접대하는
堪任(감임): 책임을 감당하다
背馳(배치): 반대로 되어 어긋남
連接(연접): 서로 맞닿음
遺訓(유훈): 남긴 훈계
間出(간출): 때때로 나옴
千載一時(천재일시):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회
敷演讚嘆(부연찬탄): 자세히 설명하고 칭찬하거나 감탄하다
論貶塗改(논폄도개): 논평하고 비판하며 수정하다
刪除(산제): 깍아내리고 없애다. 刪削(산삭)과 같은 의미다.
(옮기면)
무슨까닭인가 하면,
김부식에게 이상적인 조선역사는
(一) 조선의 강토를 바싹 줄여
대동강 혹은 한강으로 국경을 정하고,
(二) 조선의 제도,문물, 풍속, 습관등을
모두 유교화하여 삼강오륜의 교육이나 받고,
(三) 그런 뒤에 정치란 것은
오직 외국에 사신으로 다닐 만한 비열한 외교적 임무나
감당할 사람을 양성하여
<동방군자국>의 칭호나 유지하려 함이다.
그러나 김부식 이전에 조선사는
거의 김부식의 이상과는 반대라 어긋났다.
강토는 요하를 건너 동몽고까지 이어졌던 때가 있으며,
사회는 낭가의 종교적 무사풍을 받아
공, 맹의 훈계와는 다른 측면이 많으며,
정치계에서는 종종
광개토왕(고구려19대),동성대왕(백제24대),진흥대왕(신라24대),
사법명, 을지문덕, 연개소문 같이
외국과 도전하는 인물이 가끔 출현하여
김부식의 두통꺼리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는데
이제 좀처럼 만나기 힘든기회가 왔다.
서경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회삼아
그 사대주의를 근거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사대주의에 걸맞는 사료는 자세히 설명하고 칭찬하거나 혹은 고쳐쓰며
마음에 들지않는 사료는
논평하고 비판하며 수정하거나 혹은 깍아내리고 없애버렸다.
< 출처: 조선역사상일천년래 제일대사건>
김부식의 후손이 있다면,
민족앞에 대죄를 지은 조상을 둔것을 부끄러워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