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07(토)역사단편147. 독사신론讀史新論(28) 기록의 중요성

in Avle 종교 철학 인문학10 days ago (edited)

오늘도 혼란했던 시기에 ' 홀로 정신 멀쩡했던' 사람의 글을 읽어간다.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다.
< 출처: 단재 신채호, 讀史新論[독사신론]>

<뜻, 해설참조: 다음, 네이버사전, 인터넷검색>

지난 글에서는,
조선인들의 노예근성을 비판하고 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중국을 숭배할때는 지나인이 쓴 글들을 전부 믿고,
일본을 숭배하게 되니 일본인들이 쓴 글을 전부 믿어버리는
노예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諸公(제공)은 試思(시사)하라.
古時에도 我國 學士(아국학사)가 日本에 渡(도)하여
其 風俗歷史(기 풍속역사)를 探(탐)한 者가 不無하나,
姜睡隱(수은 강항) 拾年 看羊(십년 간양)에
毛利輝元(모리휘원)의 百濟遺種(백제유종)됨만 聞(문)하였고,
神功女主(신공여주)가 新羅 征服(신라정복)한 事는 未聞(미문)하였으며,
金東溟(김동명)氏 八月 乘槎(8월 승사)에
新羅 太宗(신라 태종)이 大阪征服(대판정복)함만 記(기)하였고
[金世濂(김세렴)氏 乘槎錄(승사록)에 曰,
日本年代記(일본연대기)에서 據(거)한 바라],
彼 神功女主 云云 壹事(피 신공여주 운운일사)는
當初(당초)에 未有(미유)하였으니,
何故(하고)로
古時 我國人(고시 아국인)의 日本史(일본사)를 讀(독)하는 者는
此等事(차등사)만 得聞(득문)하고,
彼等事(피등사)는 未聞(미문)하였나뇨.
<출처: 讀史新論(독사신론)>

看羊(간양): 보고 들은것
毛利輝元(모리휘원): 16~7세기의 일본무장
百濟遺種(백제유종): 후손
神功女主(신공여주): 신라를 정벌했다는 전설의 여왕
金東溟(김동명): 東溟은 김세렴의 호
乘槎(승사): (뗏목)배에 올라탐,
乘槎錄(승사록):『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을 말한다.
김세렴(1593~1646)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쓴 일기
此等事(차등사): 이런 일<여기서는 신라의 오사카정벌역사>
彼等事(피등사): 저런 일< 여기서는 신공여주의 신라침입주장>
得聞(득문): 얻어 들음

김세렴의 해사록에는 '태종'이라는 이름이 없다.

(옮기면)

여러분들은 생각해 보라.
옛날에도 우리나라 학자들이 일본에 건너가
그들의 풍속과 역사를 탐구한 사람들이 없지 않다.
'수은 강항'이 10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모리휘원이 백제의 후손이라는 것만 들었고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한 일을 듣지 못하였으며,

김세렴이 8월에 뗏목을 타고 일본에 들어갔을 때
신라 태종이 오사카을 정복한 것만 기록하였고
([김세렴]이 『[승사록]』에 말하기를,
이 사실은 일본 [연대기]에 의거하고 있다고 한다 ― [원주])
저 신공왕후 운운한 일은 애초에 없었으니,
무슨 까닭으로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일본역사를 읽는 사람들은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한 일만 들을 수 있었고
신라 태종이 오사카을 정복한 것은 듣지 못하였는가.

관련기록을 살펴본다.

동명집.JPG
1636년 4차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세렴의
'해사록'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동명해사록>聞見雜錄(문견잡록)편에 실려있다.

日本邈在天東。四面大海。外兵不入。
但見其年代記, 其所謂神應之二十二年, 新羅兵入明石浦。浦距大坂纔百里。
赤間關之東有一丘壟, 倭人指之曰, 此卽白馬墳。
新羅兵深入。日本人請和解兵。刑白馬以盟。埋馬於此云。
<출처: 동명해사록, 聞見雜錄(문견잡록)>

聞見雜錄(문견잡록): 보고들은 자질구레한 기록

옮기면

일본은 동쪽에 멀리 있으며,
사면이 대해로 둘러싸여 있어 외병이 침입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에 따르면,
소위 신응22년(291년) 신라군이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하며,
포구는 오사카에서 겨우 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 동쪽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있는데,
일본인이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길,
"이것은 백마분(=백마묘)이라고 한다.
신라군이 깊숙이 침입하자 일본인은 화해를 요청하였고,
백마를 희생하여 맹세하고 이곳에 묻었다" 라고 했다.

단재가 말한 부분에서, 태종이라는 이름은 없다.
실제로 단재는,
나중에 독사신론에 대해 철저하지 못했다며
스스로 자책했다.

글에서 '신응神應'은 '응신應神'을 잘못 적은 것이다.

위키에 따르면,
응신은 201~310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321년~430년까지 살았다고도 나온다.
109세까지 살았고 270~310이 재위기간이라고 나온다.
고무줄이다.

응신천황15대.JPG

120년의 차이가 있는데,
이걸 우리 주류역사학계에서는
어떻게든 일본측 주장대로 편하게 맞춰준다.

요즘은 2찍이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설쳐대지만,
역사왜곡에서는 1, 2의 구별이 없이 한마음으로 동참한다.
단재가 무덤에서 되살아나 피를 토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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