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일오를 새긴지 일년이 지났는데

in Korea • 한국 • KR • KO4 years ago (edited)



  1. 파스타를 자주 요리하는 편이라 다양한 파스타 면의 식감을 즐긴다. 주로 구매하는 브랜드는 Garofalo 이고, 요새는 Radiatori 면과 버섯이 들어간 면을 좋아한다. 몇 번을 먹어도 재미있는 식감에, 버터를 넣고 요리하면 풍미 깊어지는 야채 또한 철에 따라 그리고 기분에 달라 다르게 넣어 먹기 때문에 질리지 않는 듯. 소스는 오일, 아라비아따 또는 바질 토마토. 아주 가끔 페스토로 요리하기도 하지만, 귀찮기에.

  2. 그러다가 최근 자주 가게 될 곳 근처에 리들을 발견했다.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아 며칠을 못 가고 눈길만 주다가, 어느 날 30분정도 여유가 생겨 들어갔다. 혹시 몰라서 늘 가지고 다니는 장바구니백이 이럴때 유용하게 쓰인다. 입구부터 사고 싶은 재료들이 눈에 마구 띄였으나 꾹 누르고 간신히 파스타 면 코너로 진입했다. 친절하게 진열되어있지 않은데다가 꽤나 넓었기에 구석구석 잘 찾아봤으나 Garofalo 면은 없었다. 슥 둘러보다가 다음 일정에 늦을 것 같아 계산대로 가는데, 냉동고에 Chorizo 가 가공되어 만들어진 면이 보였다. 고민에 빠졌다. 과연 맛있을까, 면이 다 떨어져 가는 김에 한번 시도해볼까? 가공된 맛이 강한 육류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브랜드 이름이 알 수 없는 이탈리아어로 써져 있었는데다가(왠지 신뢰가...) 20% 세일을 하길래 한 봉지 집어들었다.

  3. 집에 와서 잠시 쉬다가 쵸리쬬!를 외치고 벌떡 일어나 요리를 했다. 누워서 쉬고만 싶은 욕망을 이겨내고 몸을 움직였으나, 아쉽게도 결과는 실패. 기대했던 맛이 영 아니었다. 쫀득하고 짭쪼롬한 쵸리쪼의 맛을 기대했건만 흐물거리고 부드러운, 미미한 분홍 소세지 맛이 났다. 면을 삶는 시간도 스톱워치를 켜고 나름 심혈을 기울였는데 밀가루 맛이 강하게 나서 조금 남겨야 했다. 안타깝게도 반봉지나 남은 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나머지도 조리를 해두었다. 해 놓으면 내일 아침엔 맛있을거야, 주문을 걸면서.

  4. 그러나 급 더워진 날씨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 확인해보니 야채들이 약간 상해있었다. 불에 한번 볶았는데도 상할 정도면 우리집이 많이 더운가 싶은데, 그건 또 아니고. 장이 그리 예민한 편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상한 음식을 먹으면 몸이 아프기 때문에 재료의 신선함에는 촉각을 세우는 편이다. 요리 하는 과정에서 간을 볼 때 작은 티스푼을 여러개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호텔에서 조리장으로 일하는 사촌 동생이 늘 강조하는, 요리에 침이 닿으면 쉬이 쉬어버리니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은 두고 잘 쓰는 중이다.

  5.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망이 슬금슬금 다시 올라오고 있는 요즘, 여름을 이길만한 무적의 음식을 찾지 못해 아쉬워하는 중이다. 요새들어 아쉬운 것들이 많다. 여름이라 그런가, 계절탓을 해본다.

  6. 친구들은 백이면 백 입을 모아 말했다. 관계란 상호적이라는 진리가 어째서 변명이 되는 것이냐고. 나를 알려는 노력과 의지를 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다고. 나 또한 그들이 같은 상황에 놓였을때 그들을 끌어내려 무던히 애를 쓰며 건넸던 말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말은 돌고 돌아 나에게 오는구나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나'를 투명하게 알아 봐주는 그 기적같은 일을 쫓는다. 나 또한 내가 알고 싶어지는 사람이 생겼다면 (아주 드문 일이기에) 최선을 다해-비록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만연한 실수투성이인 것들은 제쳐두고서라도- 노력하는 편이다.

  7. 사람이 문제가 아니란 것을, 그저 마음의 크기가 문제였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초연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관계는 이처럼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참 복잡한 것이지만 최소한 핑곗거리는 될 수 있었다. 뒤에 숨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나를 지키는데 쓰일 만한 그런 방패로.

  8. 친구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거진 한 달만에 업데이트 된 글이 반가워 완독하고 연락을 했는데 기타도 못치고 체육관도 닫아서 운동도 못하니 글이라도 열심히 써야겠단다. 주기적으로 써야하는 압박감과, 이를 기다리는 독자를 가진 글쓰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은 행운이다. 종종 글을 단련하는 과정에서 휙 보내고 비평을 해달라는 부탁을 한 번도 거절한 적 없는 귀한 친구다. 미안해 하는 나에게, 내가 쓰는 글은 언제든 자신이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고 말해주기도 하고.

  9. 현타, 이른바 '현자타임'의 줄임말로서 '무념무상의 현실 자각 타임,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매일같이 떠오르는 요즘엔 도처의 모든 것들이 이처럼 불안정하다. 이에 맞설 힘 따윈 없기에, 친구들의 온정에 잠시 기대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2020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다 적어놓은 백과사전은 역대급으로 긴 페이지를 자랑한다던데. 내게도 의미가 남다른 한 해다.

  10. 그런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던지 한 친구가 주말동안 파리를 들리며 집에 머물러도 되냐는 부탁을 했다. 가까운 나라에 사는 친구기에 주말동안 짧은 휴가를 만끽하는데 있어 프랑스 정도는 가능했던 것일까. 종종 지인들에게 파리를 오며 집에 머물고 싶다는 부탁을 받곤 하는데, 왠만하면 집을 내어주는 편이었다. 일은 주중에만 하는데다 글은 카페에 가서 쓰면 되니까.

  11. 많은 작가들의 영감이 된다는 김훈 작가의 필일오를 떠올리며 글을 쓴지 일년 정도가 되었다. 물론 다섯장을 전부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책상 한 켠에 붙어있는 문구를 보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전과 달리, -했는데 라는 식의 문장 뒤에 부사든 뭐든 붙일까 말까 밤새 고민을 하며.

  12. 레이첼 야마가타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편안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에 은유 작가의 책을 집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나의 조각난 글은 쳐다보고 싶지 않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글쓰기에 관한 글을 읽고 싶은 요즘.

Sort:  

들려! 나는 그 노래를 정말 좋아했다.
이 노래를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멕시코에서 친애하는 인사를 보냅니다! 😀

 4 years ago 

gracias!

내가 스페인어를 할 줄 어떻게 알았습니까? 🤯
아름다운 디테일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