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자유와 구속, 그리고 미래] 3-1. 아르마다의 몰락, 제 2의 로마를 보다

in #kr-history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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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역사가들이 진짜 유럽의 역사는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1400~1500년부터로 봅니다. 여전히 해적들이나 무풍지대가 많은 지중해 중앙의 일부 유역, 그리고 급선회나 급가속이 필요한 일부 군선에서는 노 젓기를 동력으로 쓰는 갤리와 갤리어스가 유행했지만, 13세기에 변혁이 일어납니다.

당시 범선들을 보면 배 앞으로 길게 뻗어나온 막대기 같은게 있습니다. 그걸 보스플릿(Bowsprit)이라 부릅니다. 이 보스플릿은 삼각돛의 성능을 극대화 하기 위해 돛을 뒤로 기울이는 과정에서 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설치된 구조물인데요. 그 보스플릿과 삼각돛 사이에 또다른 조그만 삼각돛인 지브 세일을 만들면서 자이빙이라는 항해술이 본격적으로 보급됩니다. 역풍을 극복해낸 기술의 힘으로 대 범선 시대가 온 것입니다.

거기에 사각돛을 같이 쓰는 기술이 발전하고 선박이 커지면서, 기존 유럽권의 소형 범선인 카라벨이나 남유럽-레반트 권의 다우같은 삼각돛만 사용하던 선박들은 점점 카락이나 갈레온같은 대형 복합 범선으로 발달해 나가게 됩니다. 물론 근거리에서 빠른 가속이 가능하다는 특징 상 지벡, 다우는 근해 사략선 등으로 살아남게 됩니다만, 당시로써는 초장거리 탐험이었던 아메리카 대륙, 인도와의 거래 등을 위해서는 대량의 수송이 가능하고 순풍에서 효과적으로 추진을 얻을 수 있는 복합돛 범선들이 유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산타 마리아호입니다. 보스플릿과 2개의 삼각돛, 2개의 사각돛이 보이죠

이러는 와중에 떠오른 강자가 스페인이었습니다. 레콩키스타를 통해 아랍 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그들의 영토와 돈을 뜯어내는데 성공한 스페인 왕조는 십자군 전쟁의 최대 수혜자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 시대 스페인 기독교도들에겐 이슬람 존재들은 악마같아 보였겠지만, 지금은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일어난 두 문화권의 복잡미묘한 문화 융합을 통해 후손들이 관광업을 날로 먹고 있는 점은 아이러니입니다.

여튼, 스페인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면서 모은 자본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얼마 없는 자본이니만큼 신중하게 써야 했거든요. 그나마 가장 핫한 향료 무역판에 끼어들자니 이미 가격이 너무 엉망인 상황이었습니다. 향료 무역은 동지중해부터 시작해서 베네치아 공국, 시칠리아 등 지중해 곳곳에 있는 연안의 도시들이 저마다 한 숟가락씩 얹으면서 원가 대비 50배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스페인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일이죠.

노르만에서부터 시작된 북해의 피바람이 영국과 프랑스를 백년전쟁, 장미전쟁이라는 긴 나락의 길로 빠트리던 시기, 스페인은 이 자본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게 배팅하게 됩니다. 도저히 지중해 세력들이 해먹는 꼴을 못 봐주겠다는거죠. 이 시기에 나온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스페인이 목표로 한 직접적인 인도양 무역로 개척 정책의 핵심 근거로 쓰입니다.


괜히 육메온을 하는게 아니죠. 원가대비 몇백배의 이윤이니...

당시 스페인 일반 가정의 한달 수입은 610마라베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콜럼버스라는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사기꾼은 200만 마라베디 이상이 필요하다 했습니다. 심지어는 신대륙 탐험을 위한 밑천도, 경력도 없었습니다. 사기도 8년간 치면 먹히는건지, 스페인 여왕은 콜럼버스라는 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패에 몰빵하게 됩니다. 여왕은 왕관에 박힌 보석까지 팔아가며 140만 마라베디를 직접 후원했고, 콜럼버스는 이런 왕실의 전폭적인 신뢰를 담보로 25만 마라베디를 추가로 상인들에게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콜럼버스가 비록 자신이 원한 인도를 찾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두 번의 탐험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왕실에 약속한 보물을 찾지 못했다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혹독하게 약탈했고, 그 와중 담배와 코코아라는 신제품이 시장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포토시 은광도요.

1545년에 이 엄청난 은광에서 쏟아져 나오는 은이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에 영향을 주고, 1570년 보다 저렴하게 저순도의 은광에서도 은을 정제할 수 있는 수은 아말감법이 발견되고 때마침 페루에 수은 광산이 발견되면서 세계 금융의 역사는 뒤흔들리게 됩니다. 이 은은 '가격 혁명'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고, 근대 금융으로 가는 거대한 흐름이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은이 스페인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 또한 재미난 일이겠네요.


포토시 은광은 여전히 채굴중입니다. 그 와중에 심각하게 오염되어버렸죠.

일반적으로 금과 은이 화폐로 쓰이던 시절에는 시장에 공급되는 신규 통화량이 매우 적기 때문에 물가는 매우 안정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유동성 또한 현저히 낮았다는 말이죠. 13세기에 발견된 은광이 고갈되자, 서유럽 지대의 은 공급량은 더더욱 저하되어 각국 왕실은 골머리가 아파오게 됩니다. 특히나 당시 핫한 아이템이었던 동방의 물품들을 금과 은으로 결제하면서 귀금속이 꾸준히 빠져나가기만 했거든요.

압도적인 전제 군주제와 그 군주제를 지지하는 유교라는 이데올로기가 없었던 중세 유럽의 군주들은 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을 치르든 뭘 하든, 결국 튼튼한 자금이 뒷받침 되어야 했는데, 시장에 도는 통화의 유통량이 줄고 유통 속도가 줄어들면 무역이 침체될 수 밖에 없습니다. 불경기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죠. 그런 유럽에 혜성같이 등장한 것이 신대륙의 은이었습니다.

1545년부터 1560년까지, 15년간 스페인이 약탈한 금은 5,500t, 은은 246,000t입니다. 그 뒤에는 2,500만명에서 265만명으로 격감한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와 900만명에서 130만명으로 줄어든 페루 지역의 원주민이 있었습니다. 이런 잔혹무비한 약탈을 통해 스페인은 당시 전체 유럽이 보유한 은의 80% 이상을 독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말이 좋아 '가격 혁명'이지, 은값의 폭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장에 폭발적으로 유입된 초대량의 은은, 필연적으로 가치 급락을 불러왔습니다. 문제는 이 은이 화폐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화폐의 가치가 하락되었다는 말과 같죠. 네. 바로 인플레이션입니다. 단 1세기만에 스페인의 물가는 수배 이상 뛰어올랐습니다.

농노와 수십년에서 길게는 백년짜리 고정 지대 계약을 맺은 봉건영주들과, 고정된 수입으로 살아가던 수공업자들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임대료를 왕창 올리고 물가를 올렸을텐데, 당시 영주들은 자칫 일거에 임대료를 올렸다간 농노들의 죽창이 먼저 날아왔을거니... 어쩔 수 없었겠죠. 요즘 건물주들이 당시 영주보다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스페인 내에서 은 가치 하락으로 인해 임대료와 월급의 구매력이 상대적으로 하락하게 되자 스페인은 해외 탐험에 더욱 열중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말이 좋아 탐험이지, 사실상 약탈이죠. 로마와 같았습니다. 국가 기간 산업이 약탈이 되어버렸고, 그 사이 화폐의 가치가 들쭉날쭉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본토의 경제는 거덜나고 있었습니다. 일부 신흥 상인들만 돈을 챙겨갔죠.

약탈을 한다는 것은, 군대를 필요로 합니다. 군대는 돈을 먹고 크죠. 게다가 대서양을 건너는 대규모 해외원정은 재정에 커다란 구멍을 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스페인 왕실이 약탈을 통해 빼앗은 재화는 제대로 투자되지 못했고, 그 재화는 사치품을 사는데 팔려나갔습니다. 심지어 국내 상공업에 제대로 흡수되지도 못한 채 시장의 물가만 흔들어놓았습니다.


칼레 해전에서 아르마다의 패전은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새로 떠오른 세력이 영국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사략선단을 교묘히 운용해서 스페인을 거슬리게 만들면서, 스페인 왕실이 벌려놓은 수많은 채권들을 뒤에서 몰래 사 모읍니다. 심리전도 빼먹지 않았죠. "영국 사략함대가 스페인 교역선을 털었는데 은이 남은게 하나도 없다더라"라던지, "스페인 왕실 재정이 거덜났다"면서요. 유럽 전역의 상인들은 서서히 위험을 느끼게 되고, 점점 스페인 왕실에 대한 신규 대출을 줄이게 됩니다.

스페인 왕실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당대 최강 함대, 무적이라 불린 아르마다를 모두 집결시켜 영국을 끝장내려 했습니다. 동원 가능한 군함 수는 총 132척에 달했는데, 여기서 영국 왕실은 뒤에서 한번에 만기도래한 차용증을 날려 스페인 왕실을 압박해버립니다. 덕분에 출정한 전함 수는 40여대에 무장상선을 겨우 70대 정도 끼워넣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완편되지 않은데다, 대다수가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던 스페인 해군은 줄어든 예산으로 인해 핵심 전력인 갈레온을 영입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 영국은 총 34척의 갈레온 중심의 빠른 군함과 160여척의 무장상선을 동원하여 지중해 내에서의 전투를 상정하고 꾸려진 카락와 갤리어스 중심의 함대를 북해로 끌어들여, 대승리를 거두고 아르마다를 박살내버립니다. 상대적으로 낮아서 안정적으로 북해의 거친 파도를 뚫어낼 수 있었던 갤리온에 비해 카락은 조금만 흔들려도 항행에 큰 장애가 왔습니다. 순수히 사람의 힘으로 거친 파도를 뚫어내야 했던 갤리어스는 더할나위 없었고요. 마침 찾아온 태풍에 직격당한 아르마다는 괴멸되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 열받은 스페인 왕실은 다시 영국에 복수를 했고, 양국은 지리하고 긴 싸움을 벌입니다. 그러면서 두 왕가가 쌓아뒀던 자금은 점점 빨려나갔죠. 그 대량의 자본(은)이 모여든 곳은 바로 네덜란드였습니다. 영국과 스페인이 둘 다 허덕이며 신경을 쓰지 못할 무렵, 네덜란드는 이것과 함께 엄청난 성장을 이루게 되는데요. 발전한 항해술과 함께 네덜란드는 '주식'과 '선물'이라는 새로운 금융 상품을 만들어내면서 세계 금융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오게 됩니다.


깜짝 이벤트. 이것으로 시작해서 튤립으로 끝난 금융 국가 네덜란드. 이것이 무엇인지 맞추시는 분께 1SBD를 상금으로 보내드립니다. 가장 빨리 댓글 달아주신 분 한분께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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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부터 1560년가지

까지 말씀이시죠?


자칫 일거에 임대료를 올렸다간 농노들의 죽창이 먼저 날아왔을거니

조선시대에도 양반들은 농민들이 무서워서 고기 구워먹기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인 마을 잔치를 열었을 때 자기들도 열심히 먹는다거나 했죠.


퀴즈의 답은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동인도회사 주식을 거래) 이 아닐까 했는데...역시 본문에 대놓고 써있는데 답일 리가 없죠.

드디어 녹님 이벤트에 당첨 ㅜ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새우깡 사먹으러 갑니다

와.. 대단하십니다.

튤립 으로시작해서 튤립으로 끝난..
행복한 주말되세요.^&^

동인도회사 아닌가요
빨리 봤다고 생각했으나 늦었군요 ㅎㅎ
아무튼 좋은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주식시장 아닐까요?

튤립 파동(Tulip mania)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과열 투기현상으로사실상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으로 인정되고 있다.[2] 당시는 네덜란드 황금 시대였고, 네덜란드에 새롭게 소개된 식물이었던 튤립의 구근이 너무 높은 계약 가격으로 팔리다가 갑자기 가격이 급격하게 하락한 일이 일어났다
튤립 파동의 정점은 1637년 2월이었다 튤립은 숙련된 장인이 버는 연간 소득의 10배보다 더 많은 값으로 팔려 나갔다. 튤립 파동은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투기로 인한 거품이었다.[4] "튤립 파동" 이란 용어는 이제 거대한 경제적인 거품(자산 가격이 내재적인 가치에서 벗어날 때)을 가리키는 은유로 자주 사용된다

이걸까요? ㅎㅎ

thanks ^^

향신료에 한표,,,

우와, 오늘도 유익하고 너무 재밌어요!

미술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