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금요일 밤의 송별회

in #kr-writing6 years ago



여름이 뜨거워질수록 주말 모임도 늘어나는 모양이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후배 한 명이 비자 문제로 뉴욕을 떠나게 되어 송별회를 갖게 되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가 급격히 회복되면서 졸업 후 H1B 비자(비이민 취업비자)를 신청하는 유학생들의 숫자가 폭주했다. 하지만 미국 이민국은 증가한 수요에 맞춰 쿼타를 늘리기보다는 지원자들의 서류를 모아 뽑기를 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비자 로또가 발표가 나는 매년 4월마다 수많은 유학생들의 희비가 엇갈리곤 한다. 여러 의미로 잔인한 4월이다.

비자를 받지 못한 유학생들은 해당 회사에서 7월까지만 일을 할 수 있고 그 후는 미국을 떠나야 한다. 특히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비자 조건이 더욱 까다롭게 변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고배를 마시는 분위기다. 그렇다 보니 애초에 미국 취업 그리고 더 나아가 유학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아진 듯하다.

내 후배의 경우 유럽에 본사가 있는 투자은행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그나마 운이 좋게도 런던 지사로 1년 동안 발령이 났다. 몇 주 후면 뉴욕을 떠나는 후배에게 1년 후에 다시 미국에 올 수도 있으니 런던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라고 격려를 해줬다. 웃으며 "좋은 기회라 생각해야죠"라고 말을 했지만 정작 속은 그렇지 않을 것을 알았다. 착잡한 마음에 소주병을 잡고 빈 잔을 채워줬다.




매번 모이자고 말만 하다 정작 이렇게 중요한 일이 생겨야 서로 얼굴을 볼 일이 생기는 듯하다.

비록 좋은 일 때문은 아니었지만 오래간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즐거웠다. 금요일 밤 시끌벅적한 한국 술집에 모여 예전 일들을 되새김질하니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안주를 시키고 술잔을 돌리며 직장인들끼리 모이면 의례 나오는 질문들을 주고받았다.

"잘 지냈어?"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

"아직도 같은 회사야?"

"회사는 마음에 들어?"

"어느 회사로 옮기려고?"

"새 회사는 어때?"

"요즘 뭐하고 살아?"

"앞으로 한국 갈 생각은 있어?"

진부한 질문들이었지만 술자리는 역시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원래 이런 자리에 모이면 쓸데없이 예의를 갖추며 서로 더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힘든 일이 있더라도 어둠을 감추며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점잖을 빼다 보면 여기서 뭘 하는 걸까 하는 자괴감이 밀려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로 철이 들기 전부터 알아왔던 후배들이라 굳이 웃으며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더 진솔한 얘기들이 오갈 수 있었고 그래서 조금 더 따뜻했다. 눈치를 보지 않고 가면을 쓰지 않은 채 그냥 있는 그대로 술자리를 즐길 수 있는 게 얼마만인가. 때로는 가장 간단해 보이는 것들이 가장 갖기 어려운 법이다.





안주를 비우고 술병이 늘어나자 취기가 조금씩 올라왔다. 테이블 위의 소주잔을 만지작 거리니 최근에 애인과 이별을 한 친구가 갑자기 질문을 던진다.

"인생이 뭘까요? 우리는 결국 죽음을 향해 매일 조금씩 질주하고 있는 건가요?"

질문에 손에 쥐고 있던 소주잔을 들어오려 꺾을 수밖에 없었다. 입안의 소주가 유난히 달고 썼다. 오늘 술자리도 길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한 숨을 푹 쉬었고 동시에 미소가 지어졌다.

테이블을 돌아가며 그 친구를 놀리기도, 또 훈수(라 쓰고 꼰대질)를 두기도 했다. 결국 내 차례가 왔지만 쓸데없이 말이 길어질까 봐 좋아하는 개똥철학 명언을 읊어줬다.

"달라이 라마가 그랬다더라:"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희생하고,

그 돈을 써서 건강을 회복한다.


현재를 즐기지 않고 좋은 미래를 꿈꾼다.

결국엔 현재에도, 미래에도 삶을 살지 못한다.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이게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짧은 연설이 끝나자 다들 자지러지며 테이블이 초토화가 되었다. 결국 내가 명언을 땡길 때마다 술을 한잔씩 돌리기로 합의를 봤다. 최근 스팀잇에 글을 적으며 기억력이 좋아지는 바람에 다들 저 결정을 후회할 정도로 소주병이 많이 비워진 것은 여담이다.

결국 사람은 다 비슷하다. 의식주라는 기본 욕구가 해결되면 그다음은 돈과 권력 같은 욕망이 생기는 법이고 그 후에는 자아의 실현이나 명예 같은 상위 욕구들로 넘어간다. 그리고 종착점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들인 것 같다. 역사적으로 큰 부나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결국 철학이나 종교에 심취하게 되는 것이 우연은 아닐 테다.

밤이 깊어지며 나눈 애기들을 블록체인에 박제해 놓기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 자세히 적지는 않겠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오늘 밤까지 머릿속에서 맴도는 이야기들이 몇 가지 있긴 하다.




#1: 인생은 결국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했을 때 가장 달라진 점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도 나 자신을 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지난 10년간 인생의 높낮이를 체험하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물론 막상 10년 뒤에 지금의 나를 돌이켜보면 '정말 하나도 몰랐구나'라며 혀를 끌끌 찰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몸이 늙는다는 뜻도 되지만 다르게 보면 더 지혜로워지는 여정이기도 한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을 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2: 죽음은 잔인하고 슬프지만, 어쩌면 인간의 (혹은 신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겨울이 없었다면 우리는 봄과 여름의 소중함을 몰랐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이 없었다면 삶의 소중함을 몰랐을 수도 있다.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산다. 즉, 우리가 맺어가는 관계는 좋던 싫던 끝이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끝이 있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다.

누군가 만약 내게 앞으로 살 날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얘기해 준다면 나는 매일을 full로 느끼며 소중하게 살아갈 것 같다. 하지만 3년이 쌓이고 또 쌓이다 보면 우리의 남은 인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60년은 길게 느껴질 수 있지만 3년은 짧게 느껴진다. 하지만 끝이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

결국 관점에 따라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가 달라진다. 그러니 현재를 살자. 당신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나요?





#3: 당신이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 하는 지금의 삶은 누군가에게는 꿈일 수도 있다.

예전에는 나보다 인생을 앞서가거나 더 많은 것을 이룬 사람들을 많이 부러워했다. 물론 지금도 조금은 부럽긴 하지만 후배들을 멘토링 해주면서 관점이 달라졌다.

사모펀드를 처음 들어갔을 무렵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한 때 내 꿈이기도 했지만 막상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니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칠 무렵 친구의 초청으로 멘토로 모임에 참석을 해서 멘티들 앞에서 덕담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웃기게도 내 삶은 비참했지만 어린 친구들은 내가 예전에 선배들을 동경했듯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예전에 동경했던 이들도 사실 내면으로는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완벽한 삶, 그리고 그런 삶은 사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자 어느 때보다도 더 자유함을 얻을 수 있었다.

살다 보면 힘든 일들이 찾아올 때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기억하려고 한다. 지금 내가 괴로워하는 현실이 누구에게는 삶의 목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음이 조금은 더 편안해지기는 한다. 결국 그게 중요한 게 아닐까?

내 인생의 저점을 남의 인생의 하이라이트와 비교하지 말자.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자.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 노력하자.




술병이 늘어날수록 질문들의 무게는 더해져 갔다. "결혼은 어떤가요?" "다들 이루고 싶은 꿈이 뭐예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마음에서 올라오는 이야기들을 다 했다가는 술자리를 장악해 버릴까 봐,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꼰대가 돼있을까 봐 술기운을 핑계 대며 말을 아꼈다.

그렇지만 정말 오랜만에 즐거웠다. 그리고 솔선수범해서 후배들을 미리 모으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됐다. 인생의 많은 것들은 그런 것 같다. 막상 하려고 생각하면 귀찮고 부질없어 보이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면 왜 더 일찍 하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감이 몰려오는. 특히 사람과의 관계는 더더욱 그런 것 같다.

밤이 늦었고 통장 속의 잔고는 조금 더 줄어들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여름밤의 공기를 마시며 한 명씩 인사를 시키고 떠나보냈다. 열대야는 뜨거웠지만 낭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창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집으로 돌아간 택시 안의 순간들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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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창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집으로 돌아간 택시 안의 순간들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하다.

이건 왠지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ㅎㅎ

어젯밤에 위스키의 힘을 빌어... 물론 아침에 일어나 읽으면 100% 이불킥이죠 ㅋㅋ

좋은글 아주 아주 잘 읽고 갑니다요!!!

8월에 친구 결혼식 때문에 산타모니카를 방문할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ㅎㅎ 제이님 께서 사진을 늘 올려주시는 산타모니카 피어를 드디어 가보겠군요!

인생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할수 있었습니다.
리스팀해요~

술먹고 있었던 일들을 편히 글로 적었는데 정성껏 읽어주시니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야말로 약간 복잡하고 지루한상태에서 많은 도움이되어 감사합니다.ㅎㅎ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자.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 노력하자.

깊이 공감해요. 많이 가진다고 감사할 수 있고 나눠줄 수 있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후배들과 좋은 시간 보내셨군요~

스팀잇이 좀 시들해지니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 글도 읽고 있기는 한데 댓글까지 달기는 좀 벅차네요 ㅜ 늘 잊지않고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좋은 글인데요? 리스팀해서 까먹을때쯤 여러번 읽어보겠습니다^^

학생 분들이나 사회 초년생 분들이 보셨으면 해서 패기있게 kr-youth 태그를 달아보았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갈수록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가"가 핵심 화두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지 않음의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자신의 괜찮은 점과 모난점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과업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잘 표현해 주셨네요. 나이가 들어서도 스스로에게 솔직하려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겠군요 ^^;

미네르바 님은 인생의 저점과 고점을 경험하시고 그 경험으로 올바른 통찰력을
얻으신거 같네요...아무리 겪어봐도 소중함을 모르고 넘어가는 사람도 있고
잡을수 없는 신기루를 쫒아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요..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여정이 인생 이란게 아닐까 싶어요...
좋은글 잘 읽었어요~~~

아직 젊은 사람이 저점을 경험해봤자 얼마나 낮겠냐만 그래도 협곡을 지나오니 삶이 조금은 떠 또렷히 보이는듯하네요. 저도 신기루를 쫓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남들보고 쫓지 말라고 하기도 그렇고..ㅎㅎ 어렵습니다.

술자리를 장악해 버릴까 봐,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꼰대가 돼있을까 봐 술기운을 핑계 대며 말을 아끼셔서 술자리의 주인공과 존경스런 선배가 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딴애는 말을 아꼈다지만 그건 제 기억일 뿐이고 후배들은 동의를 했을지 모르겠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