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관념은 '간직'되는 글.
한 평론가의 글을 보았다. 자신의 주관적인 감성을 담아 열심히 어떤 음악을 ‘설명’했다. 그가 내 음악에 대한 글을 쓰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글이었다.
음악은 ‘의외로’ 객관적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음악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연주자나 작곡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그 글에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문학적(시적) 표현을 사용하여 글을 아름답게 만들려고 했지만, 문학적 ‘장식’에 그쳤다.
우리는 글을 통해 사실이나 지식을 ‘기억’하고, 감성이나 관념을 전달받고 이를 ‘간직’한다.
특히 관념을 ‘간직’하는 경우, 관념은 기억(간직)하지만 그 관념을 전달받은 글 자체(문장이나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글은 좋은 글이다.
발레리는 산문을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걷기’로, 시는 그 자체가 목적인 ‘춤’으로 비유했다.
산문이 지식이나 관념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글(단어와 문장)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걷기)이다. 시는 그 자체가 감성이며 관념이고 목적이다. 시에 쓰인 언어는 그 관념 자체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춤’이다.
그 평론가는 음악에 담긴 감성과 관념을 전달(설명)하려는 목적을 위해 걷지 않고 춤을 추었다. 그 결과 관념도 간직되지 않고 문장도 기억나지 않는 글이 되었다.
어떤 예술분야에 대한 글을 쓸 때, 머리가 아니라 손과 몸에 기억(간직)된 경험, 직접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린 ‘몸’의 경험이 없다면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