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벌고 하루 살기] 불심검문
정형외과를 찾았다. 그냥 쉬면 나을 병을 가지고 공연히 병원을 찾는 것이 겸연쩍었으나 하루라도 더 빨리 치료가 된다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나쁜 것 같지 않았다. 몇 년 전 손가락 때문에 방문한 적이 있던 정형외과는 이미 만화카페로 바뀐 지 오래였는데 이제야 알아차린다. 시내라 분명 근처에 비슷한 병원이 있을 것 같은데, 이젠 지나가는 누군가를 붙잡고 사람 좋은 눈인사를 건네며 묻지 않아도 된다. 폰을 꺼내고 정형외과를 검색하니 내 주위 서너 군데의 병원의 위치가 지도 위에 펼쳐진다. 그 중 젤 가까운 곳을 향해서 걷는다.
아킬레스건이 찢어졌단다. 최소 2주간은 될 수 있으면 걷지 말라고 한다. 할렐루야! 2주간 내 머리 위에만 노가다 공치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셈이다. 주사처방과 물리치료 그리고 처방전을 들고 병원 문을 나선다. 아킬레스건은 도대체 어떻게 찢어지는 것일까? 짧은 구글 검색결과는 지나친 운동, 과중한 체중, 중년의 경직된 근육 등이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어느 항목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야 하는 걸까?
한적한 카페에 앉아 어제 빌려온 <검사내전>을 읽는다. 이런 류의 책들이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기 마련인 큰 활자나 넓은 줄 간격 그리고 드넓은 여백으로 적당한 책 두께를 채우는 방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문청생이던 검사가 하고 싶은 말들이 400페이지 가까이 촘촘히 박혀 있다. 아직 앞장이라서 재밌고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들을 배치해서 그런지 몰라도 거시적 이야기보단 기발한 사기꾼들의 이야기가 상세하고 구체적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것을 의심하고 봐야하는 사기꾼 잡는 검사의 내면이 그런 건지 아니면 우리 사회가 그런 건지 황량하기 그지없다. 온 세상이 사기꾼 천지다.
노가다를 시작하려고 맘을 먹은 지난 달 초에 인력사무소를 거치지 않고 인력장이 서는 길거리에 직접 서 있은 적이 있다. 수수료 10%를 아끼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모두가 천대하는 그 곳은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했던 터였다. 그 전날 밤을 이런 저런 공상을 하다가 뒷주머니에 면허증과 카드 하나를 챙겨 집을 나섰다. 간혹 아파트 공사장 같은 큰 공사장은 신분증이 필요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길거리에 서서 자신의 허우대를 무기로 지나가는 트럭을 주시하고 있어야 하는 기분은 집장촌의 직업여성이 손님을 기다리는 기분을 떠올리게 했다. 한 대의 트럭이 가까이 다가오면 한 떼의 무리들이 몰려갔다 한두 명을 태우고 트럭이 사라지면 우수수 흩어졌다. 지나가는 차들 속의 시선이 불편한 이들은 모자와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작은 지역사회에서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나도 잠깐 얼굴을 가릴까 하다 만다.
하얀 카니발 한 대가 도로에 정차한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가 곧장 구석진 뒤편 계단에 서 있는 내게로 다가온다. 나의 허우대가 맘에 들었나? 애써 밝은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 목을 한 뼘 내민다.
"xxx씨?"
그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되묻는다.
"xxx씨?"
그는 여전히 낮은 톤으로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나를 쳐다보며 재차 그 이름을 부른다.
나의 반응이 뜨악하자 그는 대뜸
"신분증 좀 봅시다"
기습적이고 고압적이다.
얼른 뒷주머니에 있던 신분증을 꺼내 보여준다.
"지나가다가 찾는 사람과 얼굴이 많이 닮아서 ..."
신분증을 돌려주고는 막 잠에서 깬 얼굴을 내 앞에서 거두고 사라진다.
그가 떠나고 잠시 후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카니발은 사라진 후고 번호판도 기억하지 못한다.
경찰관 직무직행법 3조 4항
경찰관은 제1항이나 제2항에 따라 질문을 하거나 동행을 요구할 경우 자신의 신분을 표시하는 증표를 제시하면서 소속과 성명을 밝히고 질문이나 동행의 목적과 이유를 설명하여야 하며, 동행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동행 장소를 밝혀야 한다.
초년시절 이 조항들을 달달 외웠을 그 핏기 없는 중년의 형사를 떠올리며 이젠 내가 이 조항을 외워두기로 한다. 군사문화에 길들여져 조건반사적으로 뻣뻣해져 버렸던 나를 질책한다. 그리고 온통 도둑놈 세상일 그의 마음을 상상한다.
필력이 대단하십니다. 일상글들이 수필을 읽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