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y's Writing) 그냥 좋아하는 것 vs 굳이 좋아하는 것

in #kr7 years ago (edited)

글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째서일까요.

음... 아주 거슬러 올라가면, 유전적으로 무언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책 수집가로 아내의 속을 썩혔던 외할아버지부터, 그 책더미 속의 셜록홈즈 전집을 5남매 중에 유일하게 다 읽었다며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던 엄마, 그리고 누가 외할아버지 딸 아니랄까봐, 집안의 책장들을 꽉꽉 채워넣던 엄마. 그걸 보고, 읽고 자랐던 나.

초등학교 2학년 즈음에 <예쁜 글씨상>을 받은 것도 글을 좋아하는 데에 굉장한 보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예쁜 사람은 글씨도 예쁘다.'라는 어른들 말씀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 저의 원동력이었죠.
초등학교 저학년생과 그 담임 선생님은 "일기의 노예"라고 볼 수 있는데요. 거의 매일 일기를 썼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한 학급에 학생 수는 40명 남짓이었고, 아이들의 일기를 매일 읽어주고, 코멘트 달아주고, '참 잘했어요^^' 도장까지 꽝꽝 찍어주던 선생님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수 없던(지겹던) 일기장들 중에서도 제 글씨가 예쁘다며, 저의 공책을 모두 가져오라던 제 초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께 처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글 쓰기에 눈을 뜬 건, 중학생 때였습니다. 딱히 비행한 일이 없는 조용한 청소년이었지만, 그 안에는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기였죠.
돌이켜보면, 내 마음 아는 이 하나 없는 것 같은 답답함 때문에 글로 터져나왔던 것 같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선생님도 '나'는 아니다. 진정한 내 편이 있을까?' 라는 아주 중2병스럽지만, 진지한 고뇌에 빠져있었죠.
국어 시간에 쓴 시가 칭찬을 받기도 하고, 심심하면 학교 옆의 도서관을 들락거리던 영락없는 "문학 소녀"가 되어갔습니다^^;;
스스로 "소녀"인 것도 좋았고(대략 여자라서 행복해요 느낌...), 나만의 감성, 엉뚱함, 그런 것들에 빠져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무언가 순수하게 좋아하기 힘듦을 느꼈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좋아해야 하고, 필요에 의해서 잘해야 한다는 "사회의 요구"랄까요.
인간관계에서도 진심은 결여되어 있음을 느꼈고, 앞으로 미래를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그 무게에 짓눌렸죠.
일종의 무기력증에 빠진 뒤, 그것이 20대에도 별다른 돌파구 없이 이어져 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흐르는대로 살아왔더니, 사회는 또 다시 "너만의 것"은 없느냐고 묻기 시작하더군요.
10대 중반까지만 해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좋아하는 것을 하던 나는 너무 깊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굳이"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고, "굳이" 취미를 찾아 헤맵니다. 본인의 매력을 뽐내거나, 취직을 하거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많이들 "필요"해서요(물론 아닌 분들도 계십니다~). 

좋아한다는 건 그런 걸까요?
내가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오르는 것이고, 노력하지 않아도 열정이 타오르며, 그를 위한 시간이 기다려지는 것.
내가 그것을 해야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며, 일상이 되는 것. 이게 좋아한다는 게 아닐까요.
어느샌가 왜 우리는 귀차니즘에 "나만의 것"을 잃어버렸을까요.
우리를 지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게 정말 삶일까요? 아니면, 우리 사회일까요. 어른이 된다는 게 이런 걸까요? 그저 교육의 산물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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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때
Mad clown - 새벽의 쓴 일기를 들으며 공감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

좋은 글이라고 해주시다니, 감개무량이에요>_<
@ddackgang 님 덕분에 좋은 노래 알아가요~

저도 greys 님처럼 글쓰는 것 좋아합니다.
문학소녀까지는 아니였지만 싸이월드에 간단히 하루 정리하고나면 친구들이 재밌다고 깔깔대는 거 보는 게 낙인 적도 있었죠
그런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스팀잇까지 오신 것 아닐까요? ㅎㅎ
나만의 것... 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느낀 게 저는 20대 중반이 딱 넘어서 인 것 같아요.
나이가 든다는 거 같기도하고 삶에 치인거 같기도 하네요 에구 ㅋㅋ

@amukae88 님도 글 쓰는 것을 좋아하신다니, 반갑네요^^
개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깨닫고 매진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에게 달려있잖아요.
사회의 모든 책임을 다 감당하면서 동시에 말이죠ㅠㅠ
비범한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히 이루어지지만,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재능이 낭비되지 않도록 일깨워주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 평범한 사람들의 재능을 나눌 수 있는 창 중 하나가 스팀잇을 비롯한 sns가 아닐까 하네요
요즘은요 ㅎㅎ 재능기부도 있고요~!

남들보다 쉽게 잘 되는것하고, 내가 좋아하는것. 이건 평생 숙제같아요.

그것들이 @relaxkim 님에게 숙제가 되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