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작가들의 ‘고쳐 쓰기’는 초고보다 무겁다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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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는 온 힘을 다해 팔다리를 내젓는다. 3.8km를 헤엄쳐 왔다. 중간에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1800m지점에서 다리에 쥐가 날 뻔 했다. 쥐는 다리에 들러붙기 직전에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스쳐지나갔다. 잠시 멈춰서 쉬고도 싶었다. 하지만 움직임을 멈춘다면, 그 자리에서 아주 오래 쉬게 될 거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제 100m 남았다. 저 멀리 깃발이 보인다. 다른 선수들도 저 깃발을 보고 더욱 힘을 내겠지. 선수들이 일으키는 물거품이 더욱 많아진다. 이 수영을 끝내는 방법은 결승점까지 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 멈춘다면, 헤엄쳐 왔던 3.8km는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아무런 의미 없는 거리가 될 것이다. 나머지 100m가 3.8km를 완성한다.

 5m를 남겨 놓고 수심이 얕아졌다. 이제 일어선다. 물의 저항을 허벅지로 맞서며 결승선까지 내달린다. 깃발을 향해 손을 뻗는다. 깃발을 넘어선 순간 그는 큰 착각을 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출전한 것은, 수영대회가 아니었다. 그는 철인3종 경기에 참가한 것이다. 깃발은 결승점이 아니었고, 바꿈터(철인3종 경기에서 종목이 바뀌는 지점)였다. 바꿈터엔 작은 자전거 한 대가 서 있었다. 아직 그의 앞엔 사이클 180km, 마라톤 42.195km의 거리가 남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함께 물살을 가르던 선수들도, 등 뒤에 있던 호수도 사라진다. 깃발을 통과한 그는 홀로 서 있다. 그는 자신과의 레이스를 펼쳤다. 그는, ‘작가’라는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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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단일 종목이라기 보다, 여러 종목이 혼재된 철인3종 경기에 가깝습니다.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게 글을 써서 출간하는 과정은 수영이나 마라톤의 단일 경기가 아닙니다. '초고 쓰기'의 호수를 건너온 그는 이제 '고쳐 쓰기'라는 새로운 레이스에 돌입해야 합니다.

 퇴고라고도 부르는 이 과정은, 초고를 쓰는 일보다 덜 중요하거나 금세 끝낼 수 있는 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보통 짧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겐 그런 인식이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길게 이어지는 글, 즉 앞부분과 뒷부분의 인과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긴 분량의 글을 쓸 때 이 고쳐 쓰기는 초고 쓰기보다 더욱 무겁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초고를 펼쳐 든 작가들은 새로운 레이스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작가들이 말하는 고쳐 쓰기



 인상적인 책을 쓴 여러 작가들은 고쳐 쓰기에 대해 힘주어 말하곤 합니다. 그 중 레이먼드 카버의 인터뷰를 읽고 그동안 ‘고쳐 쓰기’를 홀대하던 저는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되었습니다. 초고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고쳐 쓰기의 과정이라는 걸 레이먼드 카버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은 입을 모아 역설합니다.

 일하는 시간의 많은 부분은 수정하고 다시 쓰는 시간이지요. 집 안 어딘가에 놓아둔 이야기를 가져다가 다시 수정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지요.
 어떤 이야기의 초고를 쓰는 건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아요. 대개 한 번에 앉아서 쭉 쓰지요. 하지만 그 이야기의 각기 다른 다양한 수정본을 만드는 건 시간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한 단편에 스무 가지나 서른 가지의 다른 수정본이 있는 경우도 있어요. 열 개나 열두 개 이하인 경우는 없답니다. 위대한 작가들의 초고를 보는 건 아주 배울 점이 많고 마음에 용기를 주는 일이지요.    -레이먼드 카버

 레이먼드 카버가 ‘위대한 작가들의 초고를 보는 건 마음에 용기를 주는 일’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위대한 작가의 작품이라도 초고는 위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뛰어난 작가의 글이라도 초고는 조악하고 거칩니다. 글은 수정해야 그저 그런 돌에서 수정(rock crystal)이 됩니다. 퇴고를 거치면서 조악했던 초고는 그 위대한 빛을 점점 발하게 됩니다. 작품의 질은 대부분 이 과정에서 결정됩니다. 이 과정에 아주 공을 들인 레이먼드 카버는 다른 작가의 퇴고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가 수정을 좋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수정을 엄청나게 많이 했어요. 그는 마지막 교정쇄에서는 수정을 거듭했답니다. 『전쟁과 평화』는 여덟 번이나 수정했고, 마지막 교정쇄에서도 여전히 수정했어요. 이런 걸 보면 저처럼 초고가 엉망인 작가들이 용기를 낼 수밖에 없지요.    -레이먼드 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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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의 과정이 있어야, 수정 같은 글이 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쪽을 서른아홉 번이나 고쳤다는 건 꽤 많이 알려진 일화입니다. 헤밍웨이는 초고를 쓰고 매일 그 쓴 부분을 고쳐 썼으며, 초고를 끝내고도 여러 번 고쳐 썼습니다.

 고쳐 쓰는 횟수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작가들이 있지만, 하루키의 경우 책을 쓰는 일정 속에 아예 고쳐 쓰는 기간을 둘 정도입니다. 하루키는 대게 몇 번이나 수정을 하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습니다.

 “네 번에서 다섯 번 정도 하지요. 초고를 쓰는데 6개월을 보내고, 수정하는데 6~7개월을 보냅니다.”

 소설을 써본 누군가가, “아 제 소설은 뭔가가 빠진 거 같아요. 제 에너지를 다 쏟아내어 필생의 역작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아니었어요. 전 재능이 없나 봐요.” 이렇게 단정 짓고 소설쓰기를 때려 치기 전에, 이 질문에 한 번 대답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쳐 쓰는데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들였던가?”

 재능하면 두 말하면 잔소리라고 할 만한 작가들도, 이렇게 많은 시간을 공들여 초고를 고쳐 씁니다. 이 원리는 짧은 글을 쓰거나, 에세이를 쓸 때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내 글이 지금보다 조금 더 정제된 형태로, 한 계단 더 올라서면 좋겠다는 열망이 있다면, 고쳐 쓰기에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한 번 쓴 글을 다시 들여다보기 싫다면, 왜 내 글은 더 나아지지 않는 거지? 하는 질문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고를 다시 읽다보면 뭘 고쳐 써야 할지 보입니다. 퇴고라는 걸 모르고 살던 사람이라도, 이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더 잘 고쳐쓰게 됩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글쓰기에 훈련이 중요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고 가치 있는 책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훈련으로 길러야 할 글쓰기 역량엔 이 ‘고쳐 쓰기’의 능력도 포함됩니다. 그냥 포함되는 정도가 아니라 꽤 큰 비중을 차지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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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더 길지도 모르는 길을 가기 위해 얼른 올라타야 합니다.

 꽤 오랜 시간동안 글을 써 오면서, 호수만 건너면 결승점이 보일 거라는 착각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것입니다. 호수가 지나면, 새로운 길이 시작됩니다. 긴 글이든, 짧은 글이든 자기 자신과 레이스를 펼치는 작가라면, 새로운 길을 각오해야 합니다. 얼른 물을 털고 자전거에 올라타야 하지요.

 저에게 있어 예전에 썼던 긴 글들을 퇴고하는 일은, 새로운 글의 초고를 쓰는 일과 더불어 글쓰기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습니다.(글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아서, 참새 눈물을 쪼개 쓰는 식이지만요.) 고쳐 쓰기는 작품에 따라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지만, 호수 하나는 건넜다는 안도감 속에서 일할 수 있으므로 즐거운 일과에 속합니다. 이제 이 글을 하나 끝냈으니, 다음은 퇴고할 원고의 파일을 열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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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주제와 길이와 상관없이 고쳐쓰기가 제일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팔로우 남기고 가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미 있는 글을 손보는 것이니 익숙해지면 초고를 쓰는 일보다 재미는 덜해도 부담이 심하진 않을 듯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팔로우할게요.

퇴고에 따라서 전혀 다른 글로 변하기도 하나봐요. 그래서 또 한 편으로는 용기가 되기도 하고 초고도 쓰기 쉽지 않은데 퇴고라니.. 털썩.. 두렵기도 하네요. 생각보다 작가가 체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유정 작가님도 28을 완전히 다시 쓰셨다고 팟캐스트에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처음 버전은 바이러스 의학 논문이냐는 친구 말에 완전히 다시 쓰셨다고 합니다.

글은 고칠수록 점점 좋아지는 건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그 괴로운 과정에 몸을 즐겁게 던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세상 모든 작가님들 존경합니다.

어떤 작가에 의하면 초고에 있던 내용이 퇴고 후에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심지어 결말도 바뀌었다는 얘기도 하더라구요. 글은 역시 엉덩이로 쓰는 게 맞는 얘기죠ㅎㅎ

작가 주변에 가감없이 조언해줄 사람이 있는 건 행운인 거 같아요. 정유정 작가님이 그런 친구를 가진 게 부럽네요.
고칠수록 점점 좋아지는 결과문을 보다보면 퇴고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나봐요^^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선생님은
퇴고에 공을 많이 들이신 분으로 유명하지요.
가끔 퇴고에 지나친 고심을 한 결과
주제에서 멀어지는 위기를 맞기도하고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쳐
옥고로 재탄생하겠지요.

네 지나친 퇴고로 글은 매끄러워졌지만 처음에 살리려던 맛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황순원 선생님도 그러셨군요! 역시 명작은 그냥 탄생하는 법은 없나봅니다. ^^

정말 큰 가르침 받아갑니다.
뻘글 포스팅도 참 손이 많이 가던데.. 장편분량을 쓰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세요.
그저 짧은 포스팅을 혹시나하고 한 두번만 다시 읽어보는데도 저는 기본적으로 오탈자도 마구 보이고, 동어의 반복도 어찌나 많은지... ㅜㅜ
그래도 온라인 글쓰기는 써놓고 완료하고나서 수정을 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출판물이라 생각하면 식은땀 나네요ㄷㄷㄷ
(스팀잇에는 모든 수정기록이 남는다는 게 함정이지만요 ㅎㅎㅎ)

짧은 포스팅이든 장편이든 고치는데 들이는 시간은 많을수록 좋은 것 같아요^^
시간이 빠듯할수록 초고에 가까운 포스팅을 내놓게 되는데, 이런 경우 완료후 꼭 수정하게 됩니다.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ㅎ

읽을 때마다 고칠 부분이 보여요. 그렇다고 무작정 붙잡고 있을 수도 없고. 레이스가 언제 끝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면 끝낼 수가 있지요.

네 욕심을 낸다면 레이스는 끝도 없이 이어지겠지요.ㅎ 멈출 때를 알고 멈추기 전까지 효율적으로 고쳐쓰는 것에 익숙해져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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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쓴 글 퇴고하고 왔습니다...ㅋㅋㅋ 분명 쓸 당시에도 퇴고 엄청 했었는데, 또 몇 달만에 보니 고칠 부분이 눈에 보입니다. 전체 글을 완성하고 나면 또 퇴고할 부분이 보이겠지요?

네 어떤 작가들은 마감날까지, 1쇄가 나온 후에도 끝도 없이 고친다고 하네요ㅎ 고칠 부분은 끝없이 나오겠지만 결국 자신과 타협하는 지점이 멈출 때겠지요. ^^

스팀잇에 쓰는 글은 가볍게 쓰는지라 그냥 한번 다시 읽어보고 올리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타랑 문맥이 맞지 않는 글이 많이 보여요..
고쳐쓰기를 해야한다는 건 분명히 알지만.. 제 글을 다시 읽는게 어쩐지 어색해서..ㅎㅎ

전 제 글의 첫 독자가 저 자신이라는 생각으로 쓴 글을 여러 번 다시 읽습니다ㅋㅋ 뭔가 나르시스적인가요ㅎ 습관이 되면 오타, 거친 표현 여럿 잡아낼 수 있습니다ㅋ

정말 좋은 가르침 받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