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0 [한국학 에세이] 01 "백두대간 세계단전"

in #kr5 years ago

문광스님의 한국학 에세이 01 (불교신문, 2020.01.10)


"백두대간 세계단전"


➲ 한국불교의 힘

퇴계·율곡·다산과 같은 조선조 500년의 쟁쟁한 유학자들은 분명히 중국의 여느 석학들과 견주어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고전서(四庫全書)>의 방대한 중국학자들의 인해전술 앞에서는 왠지 모를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원효전서(元曉全書)>의 일람(一覽)은 중국학(Synology) 전공자였던 나에게는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일대 사건이었다.

“됐다, 이 정도면! 유교가 13억과 5000만명의 대결이라면 불교는 일대일(一對一)의 게임이다. 결국 관건은 누가 8000미터 히말라야 고봉정상의 진여(眞如) 자리에 발을 들여 보았느냐의 문제이다. 그래, 이제 한국불교를 공부하리라.”

불교는 각자(各自)가 각자(覺者)가 되게 하는 가르침이므로 1250 아라한이 부처님 한 분을 당해내지 못하는 법이다. 한국불교에는 위대한 정신의 빛과 문화의 얼이 있었기에 기나긴 역사를 통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한국적 성취를 지속적으로 거둘 수 있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본유(本有)의 밝은 지혜가 있었고, 본래(本來)의 탁월한 선정(禪定)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규기(窺基)는 원측(圓測)에게, 법장(法藏)은 의상(義湘)에게, 길장(吉藏)은 승랑(僧朗)에게 중국 축구대표가 한국대표팀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공한증(恐韓症)과 유사한 모종의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불교가 곧 한국정신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자 뿌리이며, 한국불교를 버려두고는 한국학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 ‘옴파로스 신드롬’

그리스 델포이 박물관에는 ‘배꼽’이라는 의미의 ‘옴파로스(Omphalos)’라는 돌 유물이 남아 있다. 제우스가 두 마리의 독수리를 지구 끝까지 날려 보내 세계를 가로질러 지구의 중심에서 만난 장소가 바로 아폴론 신전이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지구의 중심을 상징하게 된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은 제우스의 시대가 열리게 된 증표이자 고대시대의 가장 중요한 신탁의 성소가 되었다.

이처럼 자신의 국가나 지역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를 ‘옴파로스 신드롬’이라 한다. ‘중국(中國)’이나 ‘일본(日本)’도 국명 그대로가 ‘나라의 중심’과 ‘태양의 근본’이란 뜻이고 ‘지중해(地中海)’라는 표현 역시 그러하다.

실제로 지구상에는 수많은 중심혈(中心穴)들이 존재한다. 우리 몸에 상단전·중단전·하단전이 있고, 이를 확장하면 일곱 차크라(chakra)가 되며, 이밖에도 수많은 경혈(經穴)과 나디(nadi, 에너지의 통로)가 존재하듯이 지리학상에도 많은 진혈(眞穴)의 땅들이 존재한다. 세계사를 장식했던 많은 국가들은 이러한 혈자리에 존재했던 곳으로 시절인연이 도래함에 따라 그 기운을 무한 발산했던 것이다.

지금은 조그만 나라인 이탈리아나 몽고도 로마제국과 대원제국임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고,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적이 있었다. 러시아는 소련이라는 거대국가였던 적이 있었으며, 이웃 나라 일본마저도 러시아·청(淸)·조선에 만족하지 못하고 태평양의 미국 하와이까지 진출하고자 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G2로서 세계를 주도해 나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듯 세상의 기운은 돌고 돌다.

영국 철학자 러스크는 “역사는 모든 민족에게 기회를 준다. 그러나 그 기회를 선용하지 않는 민족에게 역사는 반드시 무거운 심판을 내린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도 반드시 세계의 중심이 될 기회가 한 번은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고, 그러한 시절이 도래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로 이를 맞이해야 할지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한 신드롬이나 증후군으로 허망하게 명멸해간 국가가 역사상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 백두대간은 세계의 단전

2005년 고영섭 동국대 교수는 한국불교사연구소를 열어 <문학·사학·철학>이라는 계간지를 발간하면서 기념사를 부탁해 왔다. 나는 기념사를 대신하여 ‘문사철 대일통찬(文史哲 大一統讚)’이라는 한시(漢詩) 한 편과 ‘백두대간 세계단전(白頭大幹 世界丹田)’이라는 휘호 하나를 써드렸다.

이는 ‘대한민국 백두대간이 세계의 단전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당시 처음으로 만들어 써보았던 문구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한국학 에세이’는 15년 전부터 구상해 왔던 한국불교와 한국사상에 대한 그간의 연구와 사유를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운 최치원은 ‘동국(東國)’과 ‘동방(東方)’을 적극적으로 긍정했던 인물이다. 동방은 오행으로 볼 때 목방(木方)이자 인방(仁方)으로 군자지향(君子之鄕)이자 해가 뜨는 장소이다. 중국 중심적 사유에서 비롯된 ‘동쪽 오랑캐’라는 의미의 동이(東夷)를 긍정했던 것이 아니었다. 중국이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주장했지만 중심의 개념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지리적으로 대륙의 극동부에 위치한 것이 명백한 우리나라 ‘해동(海東)’은 해가 뜨는 나라로 시작과 창조의 땅이라는 것이다. 즉 지정학적으로 중국은 우리 동국(東國)에 비해 서국(西國)일 뿐이며 우리는 해가 뜨는 나라요 중국은 해가 지는 나라라는 것이 최치원의 주장이었다.

원효가 항상 자신의 이름을 ‘해동 원효’라고 썼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동방의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며, 최치원이 중국 유학파임에도 불구하고 중화주의에 물들지 않고 ‘동방학종(東方學宗)’을 자임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가 참조해야 할 한국학의 선구적 모범이라 할 만하다.

‘한국학’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한국에 관한 인문·사회·자연 과학 분야의 통합적 연구로 한국 및 한국문화의 성격을 규명함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을 말한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학에 대한 정의는 학문적으로 명확하게 정립되지는 않은 실정이다. 앞으로 우리가 그 내실을 채우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

현 시점에서 한국학을 강조하는 것은 자국중심주의와 국수주의를 부추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중심임을 선포했던 거의 모든 국가들은 조화와 화합을 멀리한 채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전철을 밟지 말고 문화강국과 미학대국(美學大國)이 되어 세계의 정신문화에 기여해야 하겠기에 문화연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학을 하자는 것이다.

지금 전 세계는 ‘한류’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음악·영화·드라마에 열광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저변에 함장된 한국정신과 한국사상을 물어오면 명쾌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한국인이 많지 않다. 한국인에게 면면히 흘러오고 있는 문화적 심층구조와 특수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한국불교에서 그 내면의 심층구조를 추출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이 한국을 바로 알고 한국문화의 힘을 자각하는데 망매지갈(望梅止渴)의 역할을 하고자 ‘한국학 에세이’의 길을 한 번 떠나볼까 한다.


출처 : 불교신문 / 20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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