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일등의 배신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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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낙오는 죄였다. 등수가 떨어지고 실력이 떨어진다는 건 죄였다.
잘한다는 건 착하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못한다는 것은 넌 못됐다와 동일한 것이었다. 공부나 운동,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 부터 착하다는 것에 점수를 매긴 적이 없었으니까, 선생님도 부모님도 착하다는 걸 평가할 숫자를 찾지 못했으니까.

한 스케이트 선수가 인터뷰를 했고 난 잘했는데 쟤가 뒤쳐져서 라고 동료를 탓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사람들의 비난이 빗발쳤고 제명 운동 청원까지 등장했다. 궁금해서 영상을 찾아 봤다.

파란 수트를 입은 세 사람이 빙상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팀이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앞섰고, 한 사람은 뒤쳐져 마지막에 골인했다. 맨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의 기록으로 팀의 등수가 기록되므로 누가 봐도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의 책임은 컸다.

나는 만약, 이 경기가 88올림픽 때였다면 누가 비난받았을까 잠깐 생각해 봤다.
그리고 정말 격세지감을 느꼈다.

월드컵 때 아까운 골을 허용해 비난 받던 골키퍼를 떠올렸다. 자살골을 기록한 선수, 성적을 내지 못한 감독이 악플과 비난에 시달리던 문화는 그리 오래 된 게 아니다. ‘너 때문에 우리가 졌다.’ 월드컵 때 마다 어느 나라의 팀이건 축구 경기에서 누군가 자살골을 넣어 아깝게 팀이 패배하면 그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그 사람이 연습을 얼마나 했던, 피나는 노력을 했건 알 바 아니었다. 심지어 연아도 메달권에서 탈락하기만 하면 예외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뭔가 바뀌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언제부터였을까, 낙오가 아니라 이기심에 분노한 것이.
점수가 아니라 인성에 손가락질을 하게 된 것이.


모두가 TV에서 하는 이야기만 철썩같이 믿던 한 시절이 있었다. 누굴 비난해야 하는지 무얼 비난해야 하는지 뭐가 옳은 건지 방송이 가르쳐주는 걸 곧이곧대로 따라가던 시절이 있었다. 진실이 그들이 만들어주는 프레임에 불과했다는 걸, 트위터를 하면서 알았다. 트위터에서 뉴스라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허우적대는걸 지켜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프레임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뒤쳐진 이에 분노하지 않고 동료를 배신한 이에게 분노할 줄 어떤 뉴스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뉴스가 만든 프레임이 아니다. 어쨌든 뉴스의 관심은 메달이니까, 우리 선수들이 선전했냐, 안했냐니까. 당연히 마지막에 들어온 이에게 패배의 책임이 돌아갔었을 법한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반기를 들면서 뒤집어진다.

물론, 단순히 그녀의 인터뷰 당시 ‘썩소’ 가 재수없어서, 였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고 흥미로웠다. 늦게 골인한 건 죄가 아니지만, 동료를 탓하는 건 죄야. 팀워크를 배신한 점수는 더 싫어.
메달 못 딴 것에 화 낼 정도로 우린 이제 유치하지 않아.


우연찮게 기회가 되어 학부모와 선생님들을 종종 만난다. 4차 산업혁명 대란(?) 이후로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중요하다, 협력을 가르치시오 라는 이야기는 선생님들이 무더기로 연수를 듣는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필수 역량 가운데 공감능력, 협업능력이 계산능력, 암기능력 따위를 제치고 유행처럼 급부상한 지 꽤 되었다. 사실 선생님들도 다 안다. 지금 시대가 시험 점수 같은 걸 강요할 때가 아니라는 걸. 다만 공감능력 같은 걸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지’ 몰라서, 공감과 협업을 아직 교과서와 시험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실은 선생님들도 방법을 다 아는 데 아직 학교라는 공간이나 제도 자체가 제약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늘날 더 이상 시험 점수가 높다는 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걸, 누구나 다 안다는 거다. 실력이 있다는 게 그 사람이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뭔가를 아주 잘한다는 게 그 사람이 함께 하기 좋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며 뭔가를 잘 못 한다는 것도 죄가 아니라는 것도. 실력있고 잘나 봤자 부당하게 나랏돈 처 먹는 걸 지겹게 봤고, 겁나 똑똑해봤자 자기만 살라고 얄밉게 구는 사람들 지겹게 볼 만큼 봤다. 능력있는 게 알고보니 혼자 잘 사는 데만 능력 있더라, 사시를 스트레이트로 패스한 사람을 인재라고 대우해 줬지만 존경받을 가치도 없더라. 이기적이어도 좋으니 일등만 되면 괜찮다는 그런 강요엔, 이젠 더 이상 속기 싫다는 아우성. 어쩌면 한 어린 선수가 받기엔 과도한 비난엔 사람들이 근 몇 년 간 느꼈던 그 분노가 투영된 건 아닐까.

아마 어제의 논란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있다면 그들도 기억할 것이다. 세 사람이 함께하는 팀에서 한 사람이 뒤쳐저서 기록이 떨어졌다고, 그런데 그 한 동료를 두고 먼저 간 두 사람이 비판받았다고. 너희들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함께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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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긍정적으로 볼 부분도 그리고 부정적으로 볼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쟁이 아니라 협업, 함께 가는 것,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라고도 볼 수있겠지만 가끔은 정말 모두가 다 그런 생각 때문에 분개한 것일까?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아주 수많은 사건들을 단시간에 겪어왔기 때문에 원인을 한 가지로 귀결 시키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들어 댓글을 남겨보았습니다. ^^

그쵸. 저도 처음엔, 또 다른 마녀사냥거리를 만든 건가? 하는 의심이 있었어요. 하이에나처럼요. 그래서 과도하게 비판하는 게 너무 잘못된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어느정도 공감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아마 모두가 다 정의로운 마음으로만 비판하진 않았을 꺼에요.

어쩌면 한 어린 선수가 받기엔 과도한 비난엔 사람들이 근 몇 년 간 느꼈던 그 분노가 투영된 건 아닐까.

어제 오전, 국민 청원이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음? 분명 해당 선수가 잘못한건 맞지만 이게 청원까지 올라갈 일인가?' 라고 생각했고, 20만은 당연히 넘지못할꺼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청원에 30만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polonius79 님의 글을 읽고보니 청원에 동의한 30만의 심리가 이해가네요.
저는 30만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선수들의 문제 뿐만아니라, 오랜기간 쌓였던 빙상연맹의 비리와 파벌싸움에 대해 사람들이 개선을 원했으나 반영할 방법이 없었는데 팀추월경기 사건이 계기가 되었나보다... 생각했어요.
(김연아선수 소치 은메달 사건이나, 안현수 선수의 이적 등을 통해 이미 외부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죠)
좁게 보면 빙상연맹에 대한 분노였다면 넓게 봤을때 일등만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대중들의 가치기준이 변화하고 있다는걸 보여주는 사건이었네요.

좋은글 덕분에 시야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30만이라 깜짝 놀랐어요. 이게 이렇게 대중적인 분노를 자아낼 사건인가? 그 어린 선수가 그만큼의 비난을 받을 만한가? 사실 뭘 모르는 어린 선수를 비난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니까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깊은 비리가 도사린 뇌관을 건드린 '계기' 일 수도 있겠네요...

그 선수가 어려서 뭘 몰라서 그랬다고 말하기엔 이미 다 큰 성인이었지만
현재의 비난을 다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한것 같아요...ㅠㅠ
오늘 경기를 어떻게 진행할지... 좀 걱정되네요...

다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단순히 선수에 대한 처벌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빙상연맹을 포함한 체육계의 비리가 겉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태권도, 씨름 등등 비리와 파벌싸움으로 망가진 곳들이 너무 많아서ㅠㅠ)

고질적인 병폐와 악습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고...그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서 생긴 결과가 아닌가 싶네요
저도 청원숫자보고 놀랐어요
공감하는 내용이고 소통하는 이웃이라서 맞팔 신청합니다
외화를 통해서 가정,국가경제에 도움되고자 하는 신입뉴비
dollarlove입니다

지금은 과도기겠지요..? 사람들이 예전의 정량화된 점수에만 집중했다면 지금은 '과정'을 포함한 '인성'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례인것 같아요. 아직까진 우리가 어느 강도로 반응을 해야하는지 몰라서 일단 분노를 터트리고 보나봐요. 저 같은 경우도 해당 인터뷰 영상을 봤을때는 화가 났는데... 사실 저 선수들이 이제 막 성인이 되었는데,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50-60대 되신 어르신들도 철 없는 분이 얼마나 많은데.
이번 일로 인한 분노가 가라앉고나면 우리 사회 구성원들 스스로도 '아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했나? 이 정도까지 몰아갈 일은 아니었는데..'라는 자성의 목소리를 낼거라 생각해요.
이러한 과도기를 거쳐서 우리 사회가 성숙해질 걸 생각하면, 이런 과도기도 고맙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

저는 그러한 사태가 어떠한 감정의 골로부터 기인하였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선과 악의 관점에서 사람을 가르고 분류하는 것은 가급적 지양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적어주신 글과 마찬가지로, 최소한 경기장 내에서 벌어지는 경기에 있어서는, 함께 가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등과 일등이 아닌자로 나누기보다는, 함께 가고 싶었던자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았던 자로 나누고 싶습니다.

더불어, 조금 다른 관점이지만, 올림픽 경기에서 보여지는 광경으로부터 도출되는 가치를, 과연 시청자나 관중이 강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있습니다. 어디까지 무엇을 보여줘야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협력과 협동의 가치를 보고자 한다면, 이를 자연스레 보게 되면야 정말 좋겠지만 선수들에게 강제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저로서는 아직 해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입니다.

선생님이신가보네요. 저는 '슈마허의 작은것이 아름답다.'를 신념같이 믿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기술이 극대화 되어 커질대로 커지면(성장,일등,최고주의) 반성으로서 일어나는 현상인거 같습니다. 이제는 조화와 만족의 가치에 모두가 공감대를 형성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또한 잘못했다고 너무 몰아붙이는 세태도 씁쓸하더군요. 그들에게 주홍글씨를 세기는것 같았습니다. 비판을 하되 비난이 되어선 안되는데 대중속에는 증오가 숨어있어요. 이것도 불균형성장의 병폐이지요. 문명文明 이란 그 단어 속에 '밝음'이란 정신적 성숙이 필요한데요.

아름다운 글입니다.
스팀잇이 그 아름다운 사회의 축소판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자본주의 정글의 축소판이 아니고 ...

감동적이어서 리스팀 안할수가 없네요.
풀보팅도 함께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좀 우울한데,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정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된것 같습니다. 단순히 1등기업의 제품을 사는것이 아니라 소셜벤처에서 만든 제품을 사고, 의미있는 소비를 하듯이요.
교양으로 철학수업을 들었는데 와닿았던 말이 생각나네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하면 실패할수도 있지만, 과정을 즐기려고 하면 매번 성공”인것 같습니다!

네 의미 있는 소비와 같은 운동이 전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표지향에서 과정을 더 중요시하는 문화로 바뀌었죠.

이제 드디어 도덕과 정의를 말해도 욕먹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건은 안타깝지만 한편으론 실패보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