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viewing a single comment's thread from:

RE: 두려움의 근원

in #kr7 years ago

어떻게 보면 각자 연약한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두렵게 하고 두려워하며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실험용 쥐를 이용한 실험 중에서 고통을 가하는 실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더라도, 고통이 계속 반복되다보면, 결국 가만히 있는다고 하더군요. 어떠한 수를 쓰더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기에,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라 해석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체념이라 이름을 붙일지, 해탈이나 이름을 붙일지 참 어렵습니다.

만약 고통과 두려움을 통해,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결국 그 누군가는 매번 움직임을 시도하다가 이내 멈추어버리고 말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실 고통과 두려움의 끝 - 이른바 경계를 아는 사람들은, 이미 그만큼의 양을 가늠할 수 있기에, 딱 그만큼에 버틸 수 있도록 적응을 하게 되었는지도요.

요즘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생사를 오가는 일이 아닌 한, 두려움과 고통은 결국 실체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좀 더 성인의 경지에 이른다면, 생사가 오가는 일에 대해서도 실체가 없다고 느낄 수 있겠습니다만, 그 정도 수준에 이르기에는 아마 저 스스로는 부족함이 많겠지요. 일상 생활에서 (상대방이) 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가, 내 삶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는가 생각을 해보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어쩌면 두려움의 그물을 통해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니, 그 두려움과 고통은 어쩌면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해 적응과 조절이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끔 꿈꿉니다.
'당신이 주는 고통과 두려움을 거부한다. 그 것은 나의 삶과 죽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것을요.

Sort:  

<두려움과 고통은 어쩌면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해 적응과 조절이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이를 체념이라 이름을 붙일지, 해탈이나 이름을 붙일지 참 어렵습니다.

저는 이 문장에서 빛을 보았네요. 난데 없으시겠지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