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2월 20일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

in #kr7 years ago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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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이라 여겼던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고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이 사태가 알려지자마자 전국에는 비상 계엄령이 떨어졌어. 비상 계엄이란 전쟁이나 기타 비상사태를 맞아 군 병력이 경찰을 대신해 해당 지역의 치안을 장악하고 계엄군 사령관이 행정권과 사법권을 틀어쥐게 되는 무시무시한 상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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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래도록 민주주의를 염원해 왔던 몇몇 사람들은 하시라도 빨리 계엄령을 해제하고 유신 체제로부터 벗어나 민주정치를 복원하고자 일단의 거사를 준비한다. 하지만 계엄령 하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모임 자체가 불가능했어. 그래서 그들은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를 생각해 낸다. 바로 결혼식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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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홍성엽,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을 다음과 같이 거행하오니.....” 하는 청첩장도 만들어졌고 1979년 11월 24일 명동 YMCA 강당이라는 것까지 주먹만하게 박혔지. 그러나 결혼식은 가짜였어. 신랑 홍성엽은 진짜였지만 신부 윤정민은 애초에 그들의 꿈이었던 민주정치, 즉 민정(民政)을 비튼 가상의 인물일 뿐이었거든. 윤보선 전 대통령부터 젊은 학생과 노동자들까지 만장한 가운데 결혼식이 열리지만 결혼식에서 울려 퍼진 건 딴딴다단 결혼 행진곡이 아니라 날카로운 구호와 비명, 뒤늦게 사실을 알아챈 계엄군의 군홧발 소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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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사람들은 그야말로 악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어. 위장 신랑 홍성엽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만큼 특별 취급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백기완이라는 재야인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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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스승이자 선배 장준하와 함께 재판받는 백기완의 모습. 한덩치 하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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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부터 미운 털이 박혀 있었던 그를 계엄 당국은 글자 그대로 짐승처럼 다뤘어. 체중 82Kg의 육중한 체구를 자랑했던 그가 40Kg대의 말라깽이가 될 정도였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니. 냉혹한 계엄 당국조차 이러다가는 죽이겠다 싶었던지 병보석으로 내보낼 정도였어. 그 참혹한 시간들을 백기완은 자신이 지은 시(詩)를 주문처럼 읊조리고 버텼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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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멘트 바닥에 누워 천장에 매달린 15촉 전구를 보고 있노라면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절망에 몸부림칠 때가 많았다. 극한 상황에서 자꾸만 약해지는 정신을 달구질하기 위해 <비나리> 시를 지어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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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나리’라는 시는 출옥 후 요양 중에도 계속 그의 입에서 맴돌았고 그의 손에 의해 쓰여 세상 밖으로 내보내졌단다. ‘비나리’는 매우 긴 시야. 그러나 언젠가는 꼭 한 번 읽어봐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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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장한 사내를 반으로 쪼그라뜨리는 지옥불 같은 고문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쥐어짜고 부서지도록 이 악물면서 써 내린 시이고, 그 시 속에서 가물거리는 희망을 찾았던 위대한 드라마의 대본이며 참혹한 역사의 증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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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은 백기완의 육체를 파괴했지만 그 정신은 건드리지 못했어. 백기완은 광주의 살인마이자 나라를 도둑질한 전두환 정권과도 맞서 싸우게 돼. 거동도 여의치 않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랄 만큼 심약한 유리 심장이 됐지만 그는 각지를 누비면서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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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의 1983년 2월 대구에서 열린 ‘기독교 예장(예수교 장로회) 청년 대회에서 백기완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맞아. 그가 등장했을 때 청년들은 일제히 일어나 팔을 힘차게 뻗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그 노래 가사는 백기완 자신이 필사적으로 짓고 읊조리고 비명처럼 내질렀던 시, <비나리>의 일부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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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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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없는 명감독이라도 이런 명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 백기완은 노래를 듣고 그냥 펑펑 울었다고 해. 봇물 터지는 울음 속에서 노래는 천사처럼 날개를 폈고 용기와 희망과 함께 어두운 역사의 허공을 날았지. 이게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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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가 지어진 건 백기완이 노래와 마주하기 꼭 1년쯤 전인 1982년 2월 20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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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의 마지막 날 도청을 떠나지 않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다가 장렬하게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외신 기자들을 상대하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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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은행 직원 노릇도 했던 그는 충분히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어. 그러나 그는 시민군 지도자로 남아 의연하게 죽었지. 밤 시간에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야학 활동을 했던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사망한 여자 동료가 있었어.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 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 결혼식을 올려 주기로 한다. 이 영혼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빛의 결혼식>이라는 노래 테이프를 만드는데 그 가운데 백기완의 시 일부를 따서 만들어진 노래가 포함돼 있었어.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어. 노래의 주체는 윤상원과 박기순 (윤상원의 여자 동료), 즉 ‘앞서 간’ 이들이 살아 있는 자들을 향해 외치는 노래였지. 그래서 가사도 "앞서서 나가니"가 아니라 "앞서서 가나니"였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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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진단다. 이 노래 테이프를 만든 사람들은 엉성하게 녹음한 테이프를 가슴에 품고서는 꼭 혼자서만 다녔다고 해. 혹여 경찰에 잡히더라도 자기 혼자만 잡히도록. 누군가는 꼭 다른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전파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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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불렀고 이제는 윤상원의 목소리로 산 자들을 향해 내리꽂는 절규같은 노래를 듣는 사람들 역시 주먹을 부르쥐었다. 그러면서 가사가 바뀐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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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네게 80년대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고 싶다만, 비록 그 숱한 오류와 돌아보기조차 싫은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대학생들이 살인적인 독재 정권에 의롭고도 줄기차게 저항한 역사는 우리 역사 아니 세계사를 통틀어 어디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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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처럼 산 자와 윤상원같이 죽은 자의 육성이 넝쿨처럼 엉키고 담쟁이같이 역사의 담장을 타고 오른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언제나 그 빛의 한 가운데에 있었어. 독재에 맞서 싸우다 제 몸에 불을 당겼던 사람들도, 절망으로 그득한 밑바닥에서 술 취해 나뒹굴던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부르며 삶을 다지고 죽음 앞으로 나섰다. 그래서 이 노래는 곧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의 깃발이었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공화국 헌법에 대한 찬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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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노래를 ‘국론분열’의 우려가 있다고 나대는 사람들이 있구나. 아빠는 그 사람들의 나라(國)가 어디인지 묻고 싶어.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살 권리가 없다. 백기완을 고문하고 윤상원을 죽인 독재가 그립다면 그들은 차라리 휴전선 넘어 북한으로 올라가는 게 맞을 거야. 그들이 원하는 나라는 그런 나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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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히 지은이가 이 땅에 살아 있고 이 노래에 부쳐진 사연들이 있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임’이 김일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냐고 떠드는 ‘종북주의적’ 상상력의 소유자들이야말로 북한으로 가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여기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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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가 불편한 자들은 민주주의가 불편한 자들이야. 사람을 반으로 꺾어 버리는 고문이 넘쳐나고 중무장한 군대가 시민의 살을 헤집고 군화로 짓밟고 총으로 쏜 것을 당연시하는 파시스트들이야. 아직까지도 ‘광주항쟁’이 아니라 ‘광주폭동’이라 부르고 싶어 혓바닥이 들썩이는 자들이야. 그들의 코 앞에서 아빠는 가사 하나 하나 씹으면서 불러 주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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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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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r Up!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말씀하신 파시스트들이, 요즘 점점 수가 늘어나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요. 군부독재시절을 겪어보지 않은 자들이 그 당시의 호황을 외치며, 현재를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돼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게 파시스트의 탓이라는 생각보다는 결국 먹고 살기 힘드니까 (앞으로도 먹고 살기 힘들 것 같으니까)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 같기도 합니다. 산하님 글이 부디 그들을, 우리를 밝은 길로 인도하는데 일조하길 바랍니다.

그럴 수 있다면야 더할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ㅠㅠ

이렇게 자세하게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들을수있어서 좋았습니다. 많은분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지금의 자유를 다시한번 생각해봅니다.
다음 포스팅도 기대하겠습니다^^

네 새 글도 올리는데... 매일마다 그날의 역사를 짤막하게 정리한 옛 포스팅들을 올릴 것 같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

박정희 유고, 12 12, 10 26, 80년의 봄, 광주항쟁, 엄혹했던 5공. 당시 어줍잖게 어느 대학 신문사의 기자였지요. 제 마음은 바로 그 시절로 돌아갑니다.

그 무렵 저는 초딩 4-5학년이었습니다....... 아스라하네요

잘 보고갑니다 퍼갈께요^^

네 감사합니다....

복받은하루되십시요 꾸~벅^^

어 산하님 아니십니까 (__) 반갑습니다

네 하이텔 시절부터 산하라는 필명을 쓰긴 했습니다만 여러 분이 계시죠... 그 중의 하나는 맞습니다..

이글루스 시절부터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스팀에서 뵈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네임드 분들이 자꾸 들어오시니 스팀잇이 잘 될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아직 잘 모릅니다 ㅠㅠ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그분이 맞습니까?

이그젝틀리.

누구를 알고 계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반갑습니다.

딸에게 편지를 쓰시는 분..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8~90년대에 학교를 다녔으나 어디서도 광주항쟁, 임을위한 행진곡에대해 배우지 못했습니다. 임을위한행진곡에 이런 스토리가 있었군요. 36년전 오늘 탄생한 이 노래의 참뜻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팔로우,리스팀,보팅 합니다.

네 매우 소중한 노래입니다.....

잘 읽었씁니다.
80년대 학번이어서 그런지 글이 참 읽히네요.

노래가 하나하나 뇌리에 떠 오릅니다.
시대는 아팠지만, 사람들은 지금보다 참 순수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같은 대학생활은 아니었지만, 그 때가 더 좋았습니다.

마지막 사진에 가슴이 저려옵니다.
아이들에게 이제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어야 겠습니다.

팔로우 하고 리스팀도 하고 갑니다.

네 .... 그게 나이 먹은 사람들의 일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