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자 上,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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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자 上,下
공지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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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167

빈집에 혼자 내버려져 있던 경험을 여러 번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다.
그러니까 엄마는 일하러 갔거나 계하러 갔거나 그도 아니면 시장에 가느라 빈집에 남겨져 있던 경험을 가진 아이들이 있다.
낮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빈집에 남겨져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생각한다. 모두들 나를 두고 어디로 간 것일까.
아이가 아는 것은 집 안의 방들과 마루 그리고 부엌 그리고 광 안이나 다락 속이 전부이다. 아니면 집앞의 골목 학교 가는 길......
그 바깥의 세계는 아이가 알 수가 없고, 안다 해도 제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미지의 공포이다.
식구들이 자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그 경계 밖으로 나가버리고 아무 소식도 없을 때, 남은 아이에게 달겨드는 것은 무력감과 공포뿐이다. 그리고 그 공포의 이름은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이다. 이 공포는 단 한 번 빈집에 남겨져 보았거나 단 한 번 엄마에게 자신의 예쁜 생각이 무참히 거절당했다거나 하는 경험이 아니라,
그런 여러 가지 경험들의 반복으로 인해 아이에게 각인된다.
아이가 멀쩡한 성인으로 자란다 해도 그 버림 받는다는 것에 대한 감정은 아이의 가슴 속에 공포의 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아이는 이 공포의 핵을 결코 알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다. 자신은 그저 그런 집안에서 자랐다고 자신의 신상명세서를 친구에게 담담히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난 어린 시절에 대해 도무지 생각나는 것이 없어......”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성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친밀한 어떤 관계의 위기가 닥쳤을 때,
이런 생각을 자주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니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버리고 말 거야”
그들은 어머니가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었던 벌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줌으로서 일종의 복수를 꾀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떠나버리는 것,
그것은 자신이 알기로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특징 중의 하나는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만큼의 빈도와 강도로
결코 그 만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에 대해 원초적으로,
이미 마음의 핵이 되어버린
죽음보다 강한 공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니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너를 버릴거야’라
는 생각을 해본 일이 있거나
한 번의 헤어짐으로 인해 필요 이상의 고통을 오래 받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당신은 먼저 눈을 감고 당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세월의 더께 때문에
그 상처들은 흐려지거나 덧씌워졌을 뿐
상처는 언제나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223

하지만 나흘이 지났을 때 미송은 전화를 걸었다.
아주 여러 번 벨이 울린 다음에 정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ㅡ 이제 다 아팠어?
정인은 응, 하고 대답했다.
내일부터 사무실 나올거지, 하고 물었을 때도
그녀는 응, 그랬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정인은 출판사에 나오지 않았다.
미송이 전화를 걸어
내일은 나올 거지? 하면
응, 하고 한결같이 대답할 뿐이었다.
계절은 기우뚱,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어서 거리에는 벌써 반팔을 입은 성급한 사람들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방 안은 초겨울처럼 음산했다.
어쩌면
정인의 방 안에서는 시간이 조금도 흐르지 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에서야 결심을 하고 정인을 찾아온 것을 미송은 후회한다.
혼자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책감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혼자 내버려두는 편이 좋았던 것은 미송 자신이었다.
미송은 그럴 때 혼자 있는 편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사람마다, 경우마다
모든 것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남을 배려하기 위해서, 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그 순간에조차, 모두 그저 제 자신의 경우에 비춰 보고 행동하는 것이다.
미송은 그걸 생각하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딸기 먹어...... 밥은 먹고 지낸거니?"
"응."

232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여자가 미모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고졸의 여자가 그렇다면,
그것도 혼자 사는 여자가 그렇다면
그것은 때로는 많은 질곡으로 작용한다.
때때로 미모 때문에 얻게 되는 프리미엄 역시 질곡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자에게는 얼굴이 아름답거나 추하거나가 언제나 문제가 되니까.
나는, 미송에게 얼핏 전해 들은 그 여자의 생이, 만일 어려웠다면 저 아름다움의 탓이 많았을 거라는 생각을 혼자했다.

262-263

정인의 눈가에 반짝, 물기가 어렸다.
"내가 오빠를 어렸을 때부터 말이야...... 한번도 변함없이 사랑했었다는 거 알아?"
.
.
.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이제 나는 생각해.
행복이나 불행까지도 말이야.
사실은, 불행조차도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가 원해서 오는 법이야......
다만 우리는 그게 우리가 원해서 얻어진 거라는 걸 죽는 날까지 모르고 살 뿐이지.
내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그래......
언제나 몇 가지 길이 놓여 있었어.
설사 행복에 이르는 길은 아닐지라도
조금 덜 불행해질 수 있는 길이......
하지만 나는 언제나 가장 나쁜 쪽을 택했던 거야. 그럴 때마다 이게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지.
나는 아주 어릴 때 부터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어......
내가 태어난 후 아버지가 영 집을 떠났다는 것이 내 운명이었지. 그것이 운명이었다면 말이야......
민호 아빠 그리고 남호영 씨까지 나를 만나고 더욱 나쁘게 변해가는 걸 보면서 나는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 같아......
누구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불행해진다고,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는 나쁜 저주가 붙어 있다고 말이야...... 그랬지.
그래서 오빠를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
나는 나쁘게 될 소지가 많은 사람,
절대로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사람만 선택했던 거야.
날 따라다니는 저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그런
선택들이었어.
나에게 친절한 사람들을 소홀히 대하고
나에게 불친절한 사람에게 지극한 마음을 쏟아붓기......
빈 구석이 많은 사람만 사랑하기,
그래야 그 사람들이 날 버리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오빠가 결혼을 한 다음에야 나는 그 사람하고 이혼을 결심할 수 있었던 거야.
오빤, ...... 오빤 내 원죄였거든."
명수는 참담한 표정이었다.
정인은 흩어지지도 않은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올렸다.

273-274

남편과 큰아이를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잃고 자신만 기적적으로 살아나 뱃속의 아기를 조산한 여자......
처음 미송으로부터 인혜를 소개받았을 때,
인혜는 아주 담담하고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인은 생각했었다.
‘저 여자는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구나.
왜냐하면 정인은 깊은 상처를 입어 본 사람이었고,
한번 깊은 상처를 받아 본 사람들은
상처 입은 다른 사람들을 잘도 구별해내는 법이었다.
인혜는 그때 마치 누가 감정을 건드리기만 한다면,
나는 여기서 목을 놓아 울어버릴 거야’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인과 살면서 그런 인혜의 표정도 많이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286

나트륨등에 이런 그의 안경이 얼룩덜룩하다.
한때 방 안에 앉아 글을 쓰는 그의 안경을 벗겨내서 정인은 그것이 말갛게 될 때까지 열심히 닦아주곤 했었다.
ㅡ안경이 맑아야 세상이 제대로 보일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때 그는 그런 정인이 하는 양을 바라보다가 씨익 웃곤 했었다.
하지만 정인은 이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이제 정인은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그의 몫 이라는 걸.
그러니 어쩌면 자신에게 사람을 나쁘게 하는 저주가 붙어 있다는 말은 옳았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하찮은 것은 제가 할게요,
그런 힘든 일은 제가 할게요,
귀한 당신은 거기서 가만히 계세요......하고.
그녀는 그들의 할 일을 모두 빼앗아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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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늦여름쯤에 읽었던 소설,
공지영님의 ‘착한 여자’입니다.

그 때 당시 회사 도서관 한켠에 있는 낡은 책 제목이 흥미로워서 집었다가 술술 잘 읽혀서 금방 읽었던 것 같아요.

1997년 출판된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포스팅하다 찾아보니
2018년 올해 착한여자1,2로 제4판이 출간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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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라고 생각한 건 저만이 아닌가봐요~~~^^

학교다닐 때 강제 독후감 쓰기가 그렇게 싫었는데..
커서는 ㅋㅋ 인상깊었던 부분 적어두었다가,
책 내용이 가물가물할 때 이렇게 꺼내서 읽어봅니다.

이 책은 감상을 남기는 것보다
그대로 메모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휴
포스팅하며 다시 읽어보는데, 마음이 시큰시큰 합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세요.
읽어보니 좋았던 책!
공지영 작가님의 소설 ‘착한여자’ 슬며시 추천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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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남기신 독후감을 보면.... 먼가... 기존의 여성이 해야할 일의 프레임으로.... 고생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인거 ... 같네요... 으음..... 먼가 읽어보면... 공지영 답다는 얘기가 나올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책만 읽어본 기억이 나네요... ^^

아.. 저는 당시엔 공지영 작가님 책인지 모르고 읽었답니다^^;;
소설 다 읽고 저는 심리묘사 부분이나 마음 속 무의식 쪽을 들여다보는 듯한 부분이 맘에 와닿았어요.
주인공은 자기 마음 속 착한여성의 프레임에 갇혀서 인생이 힘들었죠..

어... 좀 저랑 비슷하네요. 전 남자고 대부분 그냥 만나지 않는쪽을 선택하지만요.

그렇군요~~ 성향이 다 다르니까요^^

공지영 작가의 소설은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데,
다음 도서관 갈때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
좋은 책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단테님이 읽으시면 재미없을지도 몰라요.. 남자분이라 공감 안갈수도^^; 책을 추천해 놓고 보신다고 하니, 책이 맘에 안들면 어쩌나 걱정되네요^^;;; 두가지 마음...

괜찮습니다.
제가 좀 편식이 심해서 이참에 다양하게 읽어봐야하거든요.^^

좋은 책 많이 소개해 주세요..ㅎㅎ 근데 이렇게 본문을 옮겨도,,, 저작권,,, 괜찮은 건가요?? 제가 잘 몰라서....

네^^ 요즘 책 읽을 시간이 없는게 함정입니다. ㅜㅜ
으앗... 저작권이요.... 생각을 못했네요... ㅠㅠ
두권짜리 장편 소설에 아주 일부분이라.. 괜찮았으면 ....;;;

DQmNpkf6eitQEZNjEL87pkHDq2xp2nEgeKE94KN4CdnpU1Z.gif 울곰님과 부부사이셨군요! 부럽습니다. !

귀여운 쵸파네요^^ 네 그렇습니다! 아구.. 부러울정도까진 아닌데... 감사드립니다^^

울림님 오랜만에 왔습니다!! ㅋ
저는 소설은 은근 작가 편식(?) 뭐 그런게 좀 심해서...
공지영 작가님 책은 읽은게 거의 없는 것 같네요. 봉순이 언니가 거의 마지막으로 본 작품인 것 같아요.
나중에 기회되면 이 책 꼭 사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네^^ 길마님 방문 감사해요~~~ 저도 당시엔 공지영 작가님 책인지 모르고 읽었는데;; 유명하신 분이었더라고요^^ 소설 주 스토리도 흥미롭지만, 중간 중간 심리묘사가 좋더라고요. 크... 글,소설,시.. 역시 아무나 쓰는게 아닌 거 같아요. 대단한 분들~^^

책에 대한 소개는 늘 기쁨을 줍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좀 슬플것 같네요 ..
슬픈 소설 ... 기회되면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쁨..^^ 감사드립니다.
네.. 마음이 시큰 시큰 한 부분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생성?과정이랄까.. 그런 내용도 좋았고,,
일단 재밌게 잘 읽힙니다~^^

짱짱맨은 스티밋이 좋아요^^ 즐거운 스티밋 행복한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짱짱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