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가 전래한 음식 호떡
호떡은 1880년대 화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하여 1960년대까지 유행한 음식이다. 호떡은 화교가 전래한 음식으로 값이 저렴하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아, 전국 각지에서 화교 호떡집이 영업을 하였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도 화교 호떡집이 성업했지만, 호빵의 등장과 화교 인구 감소로 점차 사라졌다. 근래 한국인이 화교 전래의 호떡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다양한 한국식 호떡을 탄생시켰다.
호떡은 원래 페르시아에서 탄생한 음식으로 중국에는 한나라 때 들어왔다. 전래 초기 호떡은 화덕에서 구워 만들었으며 얇고 둥근 빵의 형태였다. 한나라 말기와 삼국시대 때 호떡은 널리 유행하였고, 당나라 때는 황제, 귀족, 승려뿐 아니라 일반 서민도 즐겨 먹는 음식으로 발전하였다. 수도 장안(長安)에는 호떡 전문 가게가 성업했으며, 지역마다 독특한 호떡 제조 방법이 존재하였다. 호떡은 송나라 이후에도 발전을 거듭하여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으로 정착하였다.
1882년(고종 19)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체결 이후 중국인의 조선 이주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호떡도 함께 국내에 들어왔다. 1889년(고종 26) 서울에 광동성 출신 화교가 경영하는 호떡집인 푸싱빵집[福星麵包房]이 영업하고 있었으며, 1906년(광무 10)에는 17개, 1923년에는 203개로 증가하였다. 화교의 이주가 빨랐던 서울과 개항장에서 호떡집이 먼저 생겨났고, 1910년대가 되면 조선 각지로 화교 이주가 이뤄지면서 호떡집도 전국적으로 생겨났다.
호떡은 외식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한국인의 입맛에 맞고 값이 저렴한 음식이어서 서민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호떡이 대중 음식이 되면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1920년대 호떡과 호떡집을 주제로 한 수필과 단편 소설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1930년 10월 전국의 화교 호떡집은 1,139개에 이르렀다. 화교는 호떡집을 일반적으로 만터우푸[饅頭舖], 일본인은 만주야[饅頭屋]라고 불렀다. 화교 경영의 호떡집은 주로 한국인 거주지에서 영업한 관계로 강도의 표적이 되거나, 호떡을 먹고 돈을 내지 않는 한국인과 화교 주인 간에 실랑이가 자주 벌어졌다. 특히, 1927년과 1931년 발생한 두 차례의 화교 배척 사건 때 화교 호떡집은 가장 큰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 시기에도 호떡의 인기는 식지 않아 순조롭게 판매가 이루어지자 호떡집은 화교의 주요한 사업 수단으로 정착하였다.
화교 호떡집은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성업을 이어갔으며, 1963년에는 약 500여 개의 호떡집이 서울, 인천, 군산, 부산, 대구, 목포 등의 대도시에서 영업하였다. 1970년대 들어 호빵이 등장하여 크게 유행하면서 호떡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여기에다 호떡집은 화덕을 사용해 각종 호떡을 조리하는 관계로 당국의 환경 규제가 강화되자 영업이 곤란해 문을 닫는 곳이 많아졌다. 화교 호떡집은 1970년대 들어 급감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복래춘(復來春), 서울 북창동의 융태행(隆泰行) 등이 대를 이어가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길거리에서 판매되는 호떡은 화교들에 의해서 도입된 호떡을 한국식으로 변형하여 만든 것이다. 중화권에서는 한국식 호떡을 흑설탕병(黑糖餠)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호떡’의 소는 보통 계피 맛이 나는 흑설탕을 넣지만 야채, 땅콩, 견과류 등을 넣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