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독서중] 낯익은 타인의 도시(최인호)

in #postingcuration18 day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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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가 지난 해 '최근에 의미있게 읽은 책'으로 소개했던 것이 안토니오 타부키의 페소아 시리즈와 최인호 작가의 '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였다.
이런 건 또 바지런히 잘 메모해 둔다.
안토니오 타부키가 페소아를 연구하고 또 연구해 작품으로 내놓은 이 작품들은 나의 포르투갈 여행과 엮어서 뭔가 조금 품위가 있는 수필로 써도 되겠다............. 는 생각만 몇 달째 하며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수첩에 기록되어 있던 다음 책이 이거다.

고딩 때 신춘문예에 당선된 천재이며 80년대 흥행했던 영화 '겨울 나그네'에서 영화 배우, 감독과 함께 한 사진을 신문에서 봤던 거 같다. (영화 배우 못잖게 잘 생겼잖아. 탄식했지, 아마.)
이후엔 주로 역사 대하 소설을 많이 썼던 모양으로 솔직히 그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았다. '상도'라는 사극은 지금도 티브이에서 재방송을 하는데 어른들에게는 추억의 드라마인가 보다.

저자 서문이 가슴 아프다.
2010년 10월 27일에 시작해서 딱 두 달 만에 완성한 장편소설인데 항암치료로 손톱이 빠진 와중에 거의 신 들린 듯 써 내려갔다고 한다. 청탁 연재소설이 아닌 스스로의 열망에 의해 쓴 최초의 소설이란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의 작용이었을까.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런다.

나는 곧 '나'가 되었으며, K1과 K2는 합체하여 온전한 하나의 K가 되었다. 온전한 K는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알파, K를 낳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 들이 태어나기 전의 태초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오직 말씀만이 존재하던 카오스의 신세기이자 오메가의 천국이었다. (p378)

참고로 작가는 1987년 가톨릭으로 귀의했다.

K라는 주인공은 어느 날 아침 이상함을 느낀다. 토요일인데 자명종이 울렸고, 그가 늘 쓰던 스킨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얼굴은 분명 아내인데 어딘지 이상한 아내를 의식한다. 애완견이 그의 다리를 물었다.

그날은 처제의 결혼식이 있는 날인데 식장에서 생전 처음 장인이라는 사람과 악수한다. 죽었다던 장인이 어떻게 여기 나왔냐고 물었더니 부모가 이혼한 꼴을 보이느니 차라리 없이 결혼한 거라고 아내가 대답한다. K는 간밤에 술집에 놓고 온 휴대폰을 찾기 위해 술집을 되짚어 찾아가나 어제 갔던 집이 아니다. 휴대폰은 엉뚱한 사람이 가지고 있었고 돌려주는 댓가로 보험 가입을 요구한다.
아무리 봐도 모두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당하는 복제인간 또는 대역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친구의 조언대로 유일한 혈육인 누이를 찾아 나선다. 십년 만에 만난 누이와도 뭔가 어색했고 자신이 누나에게 썼다는 편지와 사진을 받아서 돌아온다.

자신은 기억에 없는데 편지엔 돈을 빌려 달라는 간곡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주인공은 편지를 쓴 다른 K가 있음을 확신하고 편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해서 그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사창가에 기둥서방으로 눌러 붙어 있던 자기와 똑같은 인간을 보고 서로 놀란다. 이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복제되었다고 인정하고 돌아 선다.

내친 김에 K2의 아내와 딸이 있는 곳을 찾아가니 가난한 동네에, 그러나 자기에게 익숙한 아내와 딸이 그곳에 있었는데 다음 날 눈을 뜨니 다시 처음의 자기 아파트였다.

월요일 출근길에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토요일과 일요일에 그가 만났던 사람들이 그에게 미묘한 신호를 보내며 위로 올라간다. 지하철 선로에는 그가 은밀한 성매매 현장에서 만났던 여학생이 떨어져 있어 구하기 위해 뛰어 들 수 밖에 없었다. 힘이 빠질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K2가 그와 합체 되었고 그들은 온전한 자신이 되었다. 그 뒤가 위의 인용문이며 마지막 문장이다.

줄거리를 쓰다 보니 좀 이상해지긴 했지만, 우리가 가장 흔히 겪는 착각이 자명종에 눈이 떠지고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잠깐 헤아리며 허둥대는 것이다.
가끔 에스컬레이터 반대편으로 올라가는 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하는 적 있지 않은가.
나아가 지지리 궁상인 여기의 '나'말고 저쪽 어딘가에 우아하고 편하게 사는 또 다른 내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없는지.

삶이 유한하다.
촉망받는 작가, 뛰어난 작가는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이 작품에 녹여 넣으려 했다. 그것도 티 안나게 SF적인 소재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적인 요소와 인간 복제 관련 영화가 겹쳐진 느낌도 없지 않으나 우리 사회가 배경인지라 친근하다. 기저에 종교적 구도의 자세가 있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다.

최인호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게 되어 다행이고 다른 작품에서는 어떻게 삶을 묘사했는지 읽어볼 참이다.

최인호 / 여백 미디어 / 2011 / 12,800/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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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voted! Thank you for supporting witness @jswit.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최인호 작가님 잘 아시지요? ㅎㅎ

한강 작가가 소개한 책... 흔히들 메모까지는 잘 해놓는데...
실제 그 책을 읽는 분!!! 이 계셨군요.
대단하십니다~ 👍👍👍

최인호 작가님이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고시 공부하듯 작가 준비를 하셨단 일화로 유명한 그분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