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일기

in #stimcity2 years ago (edited)

1 작업을 마치고 나니 남은 하루는 휴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작업물은 좋기도 아쉽기도 그러면서 뿌듯하기도 한 여러 감정이 섞여 있지만 오늘은 씁쓸함만 계속 들었다. 뭔가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을 만드는 사람(나)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2 쉬는 건 쉬는 거고 할 건 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스트레칭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휴일로 정해서 마음이 해이해졌나. 남은 동작이 많은데 미련 없이 영상을 껐다. 덕분에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아침 식사를 하고 샤워를 마쳤다.

3 운동을 안 해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활기가 넘쳤다. 소파에 쌓인 옷을 정리하고 행주를 삶은 후에 싱크대를 열심히 닦았다. 반짝이는 싱크대 위에서 좋아하는 드립백으로 커피를 내렸다.


4 모기 때문에 잠을 설쳐 평소보다 일찍 깼다. 블라인드를 올렸는데 밖이 캄캄했다.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5 오늘 만든 게 필요 이상으로 무거웠던 것은 아마도 날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두운 풍경을 보며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온갖 상념과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후회가 몰려왔다. 어두운 감정을 해소하지 못한 채 작업을 시작한 게 오늘의 문제였던 것 같다.


6 휴일엔 뭘 해야 하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싶었다. 심심한데 나와-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아무렇지 않게 나올 수 있는 사람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놀고 싶었지만,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혹 누군가 나와준다고 해도 재밌게 놀 수 없을 것 같았다.

7 집안일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 향긋한 커피 냄새와 함께 Ketil Bjørnstad의 Early Piano Music 앨범을 들었다. 매일 음악을 듣지만 오늘은 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아주- 아주아주아주 오랜만에 앨범을 골라 듣는 기분이었다. 일상에 색채를 더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나에게 깊은 의미를 가진 앨범을 고르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책으로 가득 채운 책장에서 신중하게 오늘 읽을 책 한 권을 고르는 기분과 비슷했다.

8 케틸 비에른스타는 광활한 자연을 주제로 한 웅장한 작품을 주로 만든다. 유명한 재즈 레이블 ECM의 대표적인 아티스트 중 하나지만, 나는 그런 음반 만큼(가끔은 그런 음반 보다도) 이름도 처음 듣는 Hurbo라는 레이블에서 나온 이 소박한 앨범을 좋아한다.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머릿 속에그가 만든 장대한 음악은 사라지고, 피아노를 오래 친 친구를 만나 함께 피아노가 좋은 이유에 대해 말하는 그런 기분이 든다.


9 앨범을 듣고 있으니, 유년 시절- 로 대변되는 어떤 풍경이 떠올랐다. 장소는 유럽 어딘가였다. 광활한 녹색 언덕,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초라하고 아늑한 내 집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상상 속 내 나이는 6~7살 정도인데도 그 집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그곳에는 폭신한 침대와 새하얀 침구, 황토색에 가까운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 하나가 있다.


10 집안일을 하기 전엔 류이치 사카모토의 Bolerish를 들었다. 멈출 듯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멜로디가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방울 같았다.


11 드문드문 오버워치 리그를 보고, 점심을 먹고, 좋아하는 콜드브루 캔을 꺼내 또 커피를 마시고, 짧게 낮잠을 자고, 4km 정도 떨어진 쇼핑몰에 자전거를 타고 가 옷을 구경하다 왔다.

12 집에 와서는 또 샤워하고, 쇼핑몰에서 산 물건을 간단히 정리하고, 잠깐 새 흐트러진 집안의 물건을 다시 제자리로 옮겨 놓았다.


13 가볍고 편한 평상복 차림으로 집 뒤 공원을 산책했다. 산책 때 신는 운동화 대신 여름 샌들을 신었다. 맨발에 와닿는 고무의 부드러운 감촉이 좋았다. 땀은 나지만 시원하게 부는 흐린 여름 바람이 좋았다.

14 7월 들어 아홉 시 전에 잠든 적이 없다. 수면 시간이 줄었는데도 피곤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산책 내내 계속 졸리고 몸이 무거웠다. 나는 걸으면서 졸음을 느끼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했다.

15 그래서 한편, 어쩌면 나는 줄곧 긴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6 부쩍 높아진 운동 강도, 체력이 좋아졌다고만 생각했는데 체력은 그대로고 그저 무식하게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오늘 저녁 운동을 거르고서야 처음 해보게 되었다.

17 졸음이 쏟아지는, 손빨래할 운동복이 없는 저녁. 휴일은 이런 것인가? 백수지만, 백수니까 더 살뜰히 휴일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쉰다는 것은 참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