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요일

in #stimcity2 years ago (edited)

1 요즘은 네시~네시 반 사이에 잠에서 깬다. 하지가 다 돼서야 원하는 때에 일어나게 된 게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원하던 시각에 일어나게 된 것이 기쁘다. 다음 주는 계속 흐릴 예정이라지만 그래도 다음 주는 일출에 맞춰 청계천을 달릴 생각이다. 나름의 작별 인사랄까.

2 네 시에 일어나 본적은 나도 많지 않아서 그렇게 이른 시각에(가끔은 세 시 반에 깰 때도 있다) 눈을 뜨면 당혹스러운 마음과 함께 온갖 상념이 밀려온다. 바깥은 농도 짙은 어둠으로 캄캄하고, 나는 여기도 저기도 아닌 애매한 곳에 속해있는 기분이 든다.

3 오늘은 몸을 풀기 전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반을 틀었다. 집중이 잘 안됐다. 류이치 사카모토 들으며 몸풀기, 세상에서 가장 상반되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았다. 꾸역꾸역, 몸 곳곳을 풀면서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을 계속 내게 던졌다. 답답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은 일요일이니 화분에 물을 줘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니 화분에 물을 줘야 한다.


4 루틴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진심으로 그렇다. 이곳에 들어와 얻은 것은 여러 개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크게 얻은 것은 규칙적인 생활과 체력이다. 아침-점심-저녁으로 크게 시간을 나눠 그때마다 할 일을 계획하고 지키려 노력했다. 꼭 해야 하는 일들은 빼놓지 않고 했지만 보통은 그날의 기분과 컨디션에 따라 몇 개를 생략해왔다. 요즘은 계획한 일을 거의 다 끝낸다. 끝내고도 시간이 남아 책을 읽거나 동네를 가볍게 걷는다.

5 루틴이라고 해도 별것은 없다. 운동하고 일기 쓰고 책 읽고 뭐 그런 일들. 나는 그 사소한 일들을 동아줄을 붙드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매달렸다. 돌아보면 내세울 만한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지만, 나만 알 수 있는 수많은 발전이 그 과정 속에 있다.

6 하루 루틴 중 가장 힘든 것, 저번 주부터 시작한 카시오페아 - Take Me의 곡 카피다. 오랜만에 카피하고 싶은 곡을 만났고, 이제 슬슬 피아노 루틴을 추가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시작했다. EP, Bass, Guitar 세 파트를 하루에 네 마디씩 카피한다. 이 일이 왜 이렇게 힘든지... 카피를 시작하기 전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7 고작 12마디인데, 고작 12마디인데 왜 이렇게 힘이 들까? 아마도 나는 그 작업에 쏟아야 하는 집중력이 부담스러운 것 같다. 막상 카피에 필요한 시간은 길어도 20분을 넘기진 않는다. 그런데도 버겁게 느껴지는 건 아직 그 정도의 밀도를 감당할 집중력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8 저번 주부터 3kg 아령을 든다. 처음 시작한 날엔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부들부들 팔 안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이 나를 괴롭게 했다. 하지만, 시작은 맨 손이었다. 겨우겨우 500ml 물병을 들던 때를 생각한다. 집중하고 고통을 견디다 보면 금세 익숙해져 다시 또 4kg 아령을 찾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9 운동을 가장 큰 비중으로 두고 생활했던 지난 반년, 언제가 가장 힘들었는가 하고 돌아보면 역시나 운동을 처음 시작하던 1월, 그저 매일 아침 헬스장에 가는 것(1km를 걷고 오는 일도 많았다)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10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미루고 싶은 Take Me도 어느 시점이 지나면 당연한 일이 되어있겠지. 매일 12마디를 그려가는 동안 빈 오선지가 채워질 테고, 나는 내 귀로 듣고 기록한 악보를 보고 손가락을 움직여 연습을 시작할 것이다.


11 7월이 되면 일을 시작할 생각이다. 대강 그려놓은 큰 그림은 있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될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는 아직 의문이다. 7월이 오면 나는 책을 내려놓고 피아노 앞에 매달려야 할 시간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돈을 버는 일은 원해서 하는 일의 몇 배의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할 것이다. 더 열심히 운동해야겠지.

12 그렇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잘 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아마 그럴 것이다. 가능만 하다면 작은 방 안에서, 내가 만든 나의 작은 세계 안에서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음악을 만드는 일이 되기를 음악 일을 내려놓던 2017년 초부터 바라왔고, 아직도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미워지곤 하지만 그것마저도 하나의 과정이길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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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내세울 만한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지만, 나만 알 수 있는 수많은 발전이 그 과정 속에 있다

너무너무 공감됩니다!

그날 그날 계획하신 일을 대부분 끝내신다니 부러워용~
체력을 얻으셨다니 축하드리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