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포탈들] 숨겨진 인연들 열넷에 둘,
"네네 박사님 말씀은 무슨 말씀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성향과 신념에 따라서 누군가는 인생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또 누군가는 선택으로 만들어가지요. 그러니 신이 아닌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확률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어떤 인연이 나에게 다가올지, 나를 찾아올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나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박사님도 유대인이 되고 싶어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건 아니시잖아요? 게다가 박사님을 존경하던 후배 학자들이 우주를 확률로 규정하는 이론을 만들어 낸 것도 다 박사님의 이론으로부터 시작된 결과가 아닙니까? 그러니 이것도 역시 업보로 받아들이셔야..."
"무슨 말입니까! 그게. 세상을 설명하는 이론은 확정될 수 없어요.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니까요.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어요. 아, 멈춘다? 이 말도 정확한 말이 아니지. 겨우 3차원적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우주를 헤아려 봐야 얼마나 알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더더욱 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해요. 신의 일부인 우리는 신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익혀가야 한다구요. 그렇게 인간이니까~ 하고 이 말 저 말을 마구 늘어놓으면 안 된다구요. 그러다 세상에 전쟁이 창궐하게 된 거 아닙니까?"
슈타인 박사와 마법사의 토론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서로 같은 말을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두 사람은 유리알 유희를 하고 있을 뿐이다. 두 사람 모두 유희의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제자였으므로.
"하지만 그 아무 말이 세상을, 우주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아닙니까? 모두가 아무 말을 내뱉자 질서가 나타나고 그 안에서 힘이 생겨나고 발전하게 되는 거죠. 가만히 제자리에 머물러만 있으면 세상은 다시 점으로 회귀하고 말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우주가 그렇게 되도록 가만두지를 않죠. 그래서 제가 학자들의 말에 반대를 한 거랍니다. 그들은 나의 권위를 인정하는 이들이니까요. 나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고 자신들의 이론을 더 검증하고 검증했죠. 그리고 세상은 이미 그들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과학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양자 컴퓨터를 만드는 단계에까지 나아갔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아직입니다. 3차원 인간의 사고로 비선형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 아니 그것도 정확한 게 아니죠.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거니까요."
"네. 바로 그 지점이에요. 시간 개념을 부정하면 인간은 인식의 블랙홀에 빠지고 말아요. 그건 나아가는 힘이 아닙니다. 그건 모두 제로로 회귀하게 만드는 재앙의 힘이죠. 인간이 3차원의 존재라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자 사명입니다. 바로 이 지점, 존재하지는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인식의 체계를 가지고 그 유한성 속에서 무한한 우주를 펼쳐내는 것이 바로 인류의 사명이자 신비인 거예요.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실 리 없으니까요."
슈타인 박사는 합력하여 역사를 이루는 신의 의지에 대해서 말했다. 확률로 존재하는 세상은 신에게 역사 창조의 임무를 부여받은 인간의 재료인 것이다. 인간은 신이 제공한 재료를 빚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무시간의 우주 속에서 유한성을 창조하여 우주를 다채롭게 구성해 가는 것이 인간의 임무인 것이라고.
"네, 맞습니다. 제 임무도 바로 그것을 일깨우는 것이죠. 하지만 인간들의 무기력과 자기연민은 좀처럼 감당하기 어려워요. 술 취한 알콜중독자를 들쳐메고 마라톤을 뛰는 것 같달까요?"
"마법사님의 노고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만, 마법사는 박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유리알 유희를 두는 동안에도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답니다. 서사 없이 팽창하는 우주는 부글거리는 화산 같아서 세상을 암흑으로 덮어버릴 수도 있어요. 그것 역시 신의 세상의 일부이지만, 지루하지 않습니까? 화산재가 되어 천년만년 잠들어 있기에는 말이죠. 그렇지 않나요? 마법사... 어, 어디 가셨지?"
슈타인 박사가 유리알을 놓을 자리를 찾으며 중얼거리는 동안 마법사는 어느새 입자가속기에 빨려 들어가 버렸다. 춤추는 발레인형이 주문을 외워 마법사를 소환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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