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포탈들] 숨겨진 인연들 여덟,

in #stimcity23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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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막다른 집에서 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막다른 집이 아니라 광장으로 나오라고 했지만. 어른들의 광장이란 마녀사냥을 위한 처형대 외에는 쓸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따분한 공간이라는 것을 소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막다른 집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보내었다. 막다른 집은 안락하며 생존에 대한 염려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풍족하지 않으나 필요한 것들은 제자리에 잘 갖춰져 있었고, 하루는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충분히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러나 소년은 소년이다. 아직 인생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소년.



'너희는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소년은 막다른 집 화장실에 놓인 두터운 경전에서 이 구절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여행자의 삶. 막다른 집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이 구절은 자신을 초청하는 운명의 초대장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나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광장을 지나가야 할 것이다. 광장의 한 복판에는 마녀를 처형하기 위해서 세워진 단두대와 화형대가 놓여 있고, 그 길을 지나는 모든 이들은 검열을 받아야 한다. 도덕과 관습, 사회적 기준과 통념의 검열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 물을 것이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여행을 시작하는 일은 당연히 의심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여행자가 전대의 돈도 없이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파이나 비행 청소년으로 몰려 소년원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광장을 지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고민에 잠긴 소년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광장은 막혀 있으나 창밖은 그대로 열려 있다. 물론 막다른 집의 창밖은 천 길 낭떠러지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이들을 위해 절벽 위에 세워진 집이니까. 어른들은 절대 창밖을 내려다보지 말라고 했다. 그곳에는 귀신들이 가득해 언제 손을 뻗어 너를 잡아챌지 모른다고 협박을 했다. 처음에는 정말 그런 줄 알고 창문 곁에는 가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어른들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감옥을 짓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감옥을 자꾸 넓혀 간다. 친구들과 가족들, 이웃들 그리고 무엇보다 소년들, 소녀들을 함께 수감시키려 한다는. 소년은 이미 수도 없이 목격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어차피 떠나기로 한 것이니까. 처음으로 열어본 창밖으로는 거대한 구조물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맙소사, 이건 에펠탑이잖아!'



소년은 사진으로만 보던 에펠탑의 늘씬한 다리가 창문 밑으로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년의 막다른 집은 에펠탑 위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갑자기 마구 가슴이 뛰며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아, 이것이다. 산다는 건 이런 거야!'



소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몸을 창밖으로 던졌다. '여행을 위하여 전대의 돈이나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경전의 구절은 소년의 지금 모습 그대로였다. 소년은 경전에 적힌 말씀을 그대로 자신에게 실현시켰다.



빠른 속도로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자, 소년은 덜컥 겁이 났다.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면 어떡하지?' 그러나 선택은 이미 끝났고 후회는 늦었다. 끔찍한 두려움이 엄습해 오자 이를 외면하려고 고개를 돌려 눈을 질끈 감으려던 찰나, 누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마법사였다. 그도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게 아니야."
"네?? 그럼, 뭐죠?"
"우주에는 위아래가 없으니까, 추락도 상승도 없는 거야.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상승이고, 멀어지고 있다면 추락이겠지. 어디로 가고 있니?"
"어디든요! 가고 싶은 곳으로요."
"그렇다면 돌진하는 중이구나. 맨땅으로 돌진."



마법사는 팔을 뻗어 소년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상승하는 제트기처럼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에펠탑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돌진하는 두 사람의 어깨에서 투두둑 날개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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