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포탈들] 숨겨진 인연들 열넷에 하나,

in #stimcity12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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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럴 순 없어요. 우주에 법칙이 없다니요."
"법칙이 없는 게 아니고 확률로 존재한다는 말이죠."
"그게 그 말이죠. 아직 발견하지 못한걸,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걸 없다고 말하면 안 되죠.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니. 참나."
"뭘 그렇게까지 말씀하십니까? 박사님답지 않게. 존재란 동시적이라는 걸 3차원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말 아닙니까. 시간의 순열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까요. 그게 단지 인식의 한계라는 걸 알만한 학자들이 그런 주장을 합니까. 3차원의 존재는 3차원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해야죠. 그리고 그 지평을 넓혀 가는 거예요. 차원을 넘나드는 척하지 말고."

"음... 생각보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네요."



마법사는 말길을 돌렸다. 오랜만에 제네바에 들른 김에 슈타인 박사를 만나보고 가야겠다 생각한 마법사는 CERN의 입자가속기를 통해 가볍게 기묘한 세계의 카스탈리엔으로 넘어갔다. 박사는 한 세기가 흘렀음에도 여전히 불만이 많다. 아니 그에게는 현재겠지만.



"그건 듣지 못하는 거지. 소리가 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박사는 입자가속기의 가속 소음이 인간의 가청 주파수를 벗어나 있어 들리지 않는 거라고 콕 집어 말했다.



"네네 박사님. 그러니까 저도 마법사지만 동시에 인간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학자들이 양자의 법칙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신의 뜻과 주사위의 결과가 분리된 것이 아닌 것은 우주의 법칙이지만 3차원적 사고로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분리되지 않은 시공간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인식한다 한들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어요? 역시 과거 따로, 현재 따로, 미래 따로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왜 어렵습니까? 이렇게 표현하면 되죠."



박사는 로비 한 켠에 놓인 전시용 피아노에 다가가서 열 손가락을 쫘악 펼쳐 동시에 건반을 눌렀다. 좌~앙 하고 로비 가득 피아노 음이 퍼져 나갔다.



"이건 도인가요? 레에요? 미에요?"
"네네. 도레미파솔라시도 아니 좌~앙 이죠."
"그러니까요. 그렇게 방법을 찾아야 해요. 없는 법칙을 새로 만들라는 게 아니라 표현의 방법을 말이에요. 우주를 설명하는 만물이론, 모든 이론을 통합하는 통일장 이론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인식의 목표이지, 미시적 현상만을 확대해서 '다 확률일 뿐이에요.' 하고 퉁칠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미시적 확률을 거대한 역사로 만들어 내는 게 인간의 소명 아닙니까? 자꾸 그런 이상한 이론을 만들어 내니까 사람들이 인생을 도박처럼 살려고 하는 게 아닙니까? 소명, 꿈 따위는 관심도 없이."



인생이 우연이고 확률이라면 운명은 없는 것이다. 인생이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면 선택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운명적이면서 또한 선택적이다. 아니 선택으로 분기한다. 나의 선택은 누군가에게 운명이 되고, 누군가의 선택은 나의 운명을 결정한다. 돌아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달은 나에게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매일 밤 소원을 비는 여인들에게는 휘영청 밝게 빛나는 불변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들의 소망이 입자를 끌어모아 현실이 되면 나는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우연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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