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

in #stimcity3 years ago

20세기 소년을 처음 방문한 후로, 키보드를 받는 조건인 다섯 번의 방문을 채우기까지 한 번 한 번의 방문이 내게는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네 번 째 방문 날 까지도 나는 키보드를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무척 큰 고민을 했는데, 그 고민은 표면적으로는 키보드였겠으나 더 깊은 내용은 그들과 함께할 것이냐 말 것이냐였다.

네 번 째 방문 날 나는 우연히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중에 나의 문제점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 일이 며칠 나를 힘들게 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고, 단지 내가 회피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20세기 소년 방문기를 소상히 공유하던 천재피아니스트에게 그 사건에 대해 말하며 "내게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이들과 하고 싶다"라는 단호한 어조로 그들과 함께하기를 결정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천재피아니스트는 내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길목마다 함께 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진행 중)


노드가 온 후로는 전처럼 비장한 각오를 하진 않고 여유가 될 때, 틈날 때마다 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남에게 숨기고 싶은 나의 모습을 하나하나 들키게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일을 할 줄 모르고 하지도 않는 나의 성격을 빗대어 공주라는 놀림을 받고 있다. 그 부분은 나를 오래전부터 괴롭혀온 것이다. 일 못하는 나. 일하지 않는 나. 눈치가 없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나. 뭔가를 시키면 항상 어수룩하고 실수만 하는 내 모습에 대한 자책이 오래 나를 따라다녔다. 그런 내 모습을 감추려 어디서든 억지로 뭔가를 하는 척을 했지만, 이곳에서는 굳이 내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미안한 한편 정말 큰 감사함으로 느껴진다.

또한 이곳에서 사람들과 여러 끼니를 함께하면서 편식왕인 내 식성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입맛이 무척 까다롭지만 사람들을 만날 때는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속으로 참아온 것 같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나의 식성을 궁금해하며 이것은? 이것은? 이라며 자꾸 질문해준다. 그중엔 아예 안 먹는 음식도 있고, 덜 좋아해서 웬만하면 먹지 않는 음식도 있지만 그것이 싫다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해소감을 느낀다.


소수점과 킴리님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박식한 사람들인데, 처음엔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려 애썼으나 몇 번의 대화 후로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킴리님은 모르는 것은 괜찮으나 모르는 데 아는 척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래서 요즘은 부끄럽지만 이렇게까지 모르는 것을 티 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른다고 말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며칠 전에는 킴리님이 나의 부탁으로 노드를 설명해준 적이 있는데, 그는 어디서 노드 설명서를 받았는지 핸드폰을 보며 노드의 기능에 대해 버튼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가 똑똑한 것은 알았으나, 음악도 하지 않는 그가 설명서만 보고 이렇게 바로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킴리님이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그것에 대해 이해하는 데 몇 달은 걸렸을 것이고, 그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설명해준 것을 다 까먹긴 했으나, 그가 기억하고 있기에 언제든 물어보면 된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어제는 라라님에게 나의 어수룩함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런 내 모습이 싫다고 말하자 라라님은 못하는 것을 할 필요 없다고, 그것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 이미 이 안에 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것이 공동체의 힘일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이지만, 곁에 그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이 나를 요즘 새롭게 꿈꾸게 한다.

아직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진 못했지만, 언젠가는 그들에게도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겠지. 요리 못하고 일 못하고 눈치 없고 맨날 아프고 까탈스럽고 아는 것도 없는 나지만, 그런 나여도 좋다는 말에 나는 웅크린 몸을 살짝 풀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