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민들레 나라로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6 month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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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2023



작년 가을 파리, 로리앤이 숨겨진 세상으로 입장했다. 커다란 두 눈을 반짝이며 전시장을 둘러보는 모습이 마치 숲속을 돌아다니다가 좋아하는 열매 나무를 발견한 사슴 같았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해서 혼자 한글을 공부하고 있다는 그녀는 우툰의 한글 캘리그라피에도 관심이 많았다. 현금으로만 계산할 수 있다는 말에 현금인출기에 다녀오겠다고 빗속으로 뛰어나가더니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비에 젖어 돌아와 인출기가 카드를 먹어버리는 바람에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결국 친구를 불렀다고, 로리앤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며칠 뒤 우리가 파리를 떠나기 전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그녀의 연락을 받았다. 커피를 마시며, 튈르리 정원을 걸으며, 전시장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리앤은 연극을 하고, 시를 쓰고, 사진을 찍는 창작자였다. 언젠가 꼭 한 번 너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프랑스어로 쓰여진 그녀의 글을 한국에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고마워. 이제는 나도 파리에 친구 있다고 말할 수 있어."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파리에 오면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고만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어진 대화를 통해 로리앤이 보여주는 반응과 내가 느끼는 기쁨이 서로에 대한 호기심이나 단순한 호의 이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건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 만나 서로를 알아차릴 때 일어나는 화학 작용이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 편안한 사람, 재밌는 사람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만, '나와 비슷한 인간'을 만나는 일은 살면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무척 소중하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양을 쫓는 모험>을 읽다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린 돌핀 호텔 프로젝트 홍보 글을 접했다며 로리앤은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하루키의 이야기가 <양을 쫓는 모험>과 <댄스 댄스 댄스>라는 사실에 우선 놀라고, 백번 천번 말로 글로 전해도 좀처럼 사람들에게 가닿지 않는 내 마음과 생각을 그 애가 알고 동시에 함께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로리앤의 그 반응은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날마다 조금씩 자라나 힘겨워 하던 나를 위로했다. 처음에는 신기하다 여겼는데 이제는 운명이었구나 생각한다. 파리의 극단에 다시 합류하기로 결정하면서 올여름 로리앤의 라다크행은 끝내 미뤄지고 말았지만, 나는 그녀를 돌핀 호텔 명예 참여 작가로 초대했다. 로리앤은 파리에, 나는 라다크에 있겠지만 각자의 돌핀 호텔 406호 룸에서 열심히 각자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을 테니 함께 작업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너의 글과 사진을 텀블벅 후원자들에게 선물할 수필집에 수록하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나의 제안을 수락하며 로리앤은 말했다. 내가 돌핀 호텔 프로젝트를 알리기 위해 쓴 글을 읽고 루이스 세풀베다라는 작가를 떠올렸다고. 그 말에 바로 세풀베다의 동화책 두 권을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그중 한 이야기를 읽다가 깨달았다. 로리앤은 내가 숨겨진 세상에서 발견한 보물이라는 걸.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이런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걷고 또 걸어왔다는 걸.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게 전부이고, 그렇게 만나진 보물들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걸. 느림은 내 방식이고, 이 방식으로만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걸. 로리앤이 전하는 모든 응원의 말은 열 배 스무 배 힘을 키워 내게 온다. 별처럼 반짝이던 그 애의 두 눈도 떠오른다.


어르신들의 말씀이 맞아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새로운 민들레 나라를 찾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가는 도중에 우리가 어떤 위험에 부딪힐지,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다 같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찾는 새로운 민들레 나라는 앞에 있지, 뒤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에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저와 함께 가든지, 아니면 우리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든지 알아서 결정하세요.

루이스 세풀베다,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