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온도 -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크리스마스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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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우리만의 작은 영화관


시간이 부지런히 흘러 12월의 끝자락에 왔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야속하게도 토요일에 들었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회사 일은 여전히 바빴다. 그래도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특별한 약속이 있었다. 티모시 샬라메를 좋아하는 언니와 몇달 전부터 보려고 벼르고 있었던 영화 <듄>을 함께 보기로 한 것이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너머로 비행기 엔진 소리가 들렸다.

"채린, 너 어디서 나 지켜보고 있는 거 아니야?
방금 부산 도착하니 딱 전화가 오네!"

약속만 잡아두고 구체적인 계획은 그때그때 세우는 것이 언니와 나의 오랜 방식. 함께 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을 때도 큰 틀만 잡아두고 세부 일정은 상황에 따라 움직였다. (심지어 남부 이탈리아 여행은 계획에도 없었다. 그저 파리가 너무 추워서 따뜻한 나라로 도망가야 했을 뿐!)

언니와 만나게 된 지도 어느덧 7년 가까이 되었다. 동백섬을 산책 중이던 어느 영국인 친구와 계속해서 마주치는 인연이 신기해 친해졌다가 언니를 알게 되었다. 배에서 고양이를 키우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언니는 그때의 내가 꼭 가지고 싶었던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올해 초 언니가 서울로 거처를 옮겨야 해서 배도 관리할 겸 이 공간을 내가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몰입하기 좋은 환경이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언니와 꼭 <듄>을 배 안에서 보고 싶었다. 둘 다 백신을 덜 맞은 상태이기 때문에 타인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배 안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 이롭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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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언니가 먼저 가 있는 마트로 가서 함께 장을 봤다. 깊은 산 속의 오두막 같은 배 안에서 온기도 유지할 겸 와인 맛을 가득 느끼기 위해 뱅쇼를 끓여먹기로 했다. 저녁으로는 4롤짜리 치킨랩과 스모크치즈 묶음이면 충분했다. 배에 도착해 나는 블루투스 스피커와 아이패드로 영화 볼 준비를 하고 언니는 뱅쇼를 만들었다. 함께 지낸 세월이 오래라 손발이 척척 잘 맞다.

<듄>을 아이맥스로 보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배에서 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선실의 둥그런 구조는 영화 음향의 전달에도 좋았고, 마치 영화 속 수송선 안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듄의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물질인 '스파이스'가 시나몬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뱅쇼를 끓이며 배 안에 가득해진 시나몬 향을 맡으니 후각적인 몰입까지 상당했다. 2시간 35분의 긴 러닝타임이 끝나고 나자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 그 긴 시간을 어찌나 몰입해서 재밌게 봤는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탄성을 내질렀다. 언니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 요즘 지내는 이야기, 최근의 관심사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자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과 출렁이는 파도가 꼭 푸른 사막 언덕 위에 있는 것 같았다. 북극의 밤처럼 추웠지만 요즘 일할 때 빼고는 꽤 오랫동안 혼자 지냈기에 간만에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즐겁게 보낸 하루였다.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기


<듄> 시리즈에 등장하는 '베네 게세리트'는 우주의 주요 세력이자 초능력자들로,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기계에 의존하지 않도록 인간의 지력과 정신력을 초인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훈련을 이어간다. 주인공 폴의 어머니가 베네 게세리트로, 영화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 제시카로부터 의식과 감각을 통제하는 훈련을 받아왔다.


"I must not fear. Fear is the mind-killer. Fear is the little-death that brings total obliteration. I will face my fear. I will permit it to pass over me and through me. And when it has gone past I will turn the inner eye to see its path. Where the fear has gone there will be nothing. Only I will remain."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움은 정신을 죽이며 두려움은 소멸을 가져오는 작은 죽음이다.
나는 두려움에 맞서 흘려보내리. 두려움이 지나가면 마음의 눈으로 그 길을 보리라.
두려움이 사라지면 아무 것도 없이 나만 남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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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m Jabbar Test Scene from <Dune(2021)>



폴이 극한의 통증을 참아낼 때 제시카가 기도문을 읊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극에 반응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고 흘려보내는 것. 뉴질랜드에서 배운 Vipassana 명상과 흡사했다. 폴이 조금씩 통증을 초월하는 과정들이 시각과 음악("Gom Jabbar" by Hans Zimmer)으로 잘 표현되었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사실 이런 고문(!)의 형식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발생하는 두려움을 비롯한 각종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들의 평온을 깨뜨리는데 충분하다. 위의 대사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미움, 질투, 슬픔, 분노 등의 단어로 치환되어도 그 뜻이 일맥상통한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일어나는 무수한 비극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12월에 막바지 피로가 쌓이면서 부정적인 감정에 쉽게 휘둘린 요즘이었는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다시 불편한 자극들을 넘어서는 노력을 멈추지 않기를 다짐해본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세 시간 동안이나 극도의 고통에 시달렸지만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가장 미운 것을 용서하는 마음. 온정을 내어주는 것(+) 만큼이나 미움을 거두는 것(-)도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무엇보다 영혼을 위하는 일이 아닐까. 부정적인 마음은 그것을 품는 사람에게도 해롭다. 그러니 남은 2021년과 다가오는 2022년에는 하루하루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며 살아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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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뱅쇼를 마시면서 타블렛을 세워놓고 함께 영화를 본다니, 평범함과 특별함이 합쳐진 하루를 보내셨네요. 듄은 아직 안 봤지만 재밌게 읽었어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 ㅎㅎㅎ 50년 된 작고 낡은 배지만, 숨어 있기에 더할 나위 없네요 :) <듄> 보시게 된다면 세계관과 철학, 화면과 사운드의 웅장함에 무척 좋아하실 것 같아요 ㅎㅎㅎ

 3 years ago 

배라니….
너무 낭만적입니다.

전기가 조금 들어오는 것 말고는 불편한 환경이라, 그래서 그런지 더 애착이 가는 공간이랍니다. :)

 3 years ago 

너무 멋진 분이시네요!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

앗, 감사합니다 ^^ 건강하고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