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in #kr7 years ago

창작과비평사의 스테디셀러는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부수가 팔려나갔는지 모르겠지만 공부 좀 한다는 내 친구들 중에 이 시리즈를 구입하지 않은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치 책을 좀 읽는 집에 <삼국지>, <토지>, <태백산맥> 전집이 반드시 진열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할까. 아직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시리즈를 모두 정독하지는 못했고, 이제 겨우 1권을 읽었지만 왜 이 책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아르놀트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이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자신이 풍부하게 쌓아왔던 인문학적인 지식을 통해 마치 한 편의 잘 만든 영화처럼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놀트 하우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하면, 그는 참으로 특이한 이력을 지닌 학자이다. 문학사와 철학 및 미술사 뿐만 아니라 경제학과 사회학까지 공부한 드문 석학이라는 점도 그렇고 부다페스트, 빈, 베를린, 파리, 런던 등과 같은 다양한 도시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자는 실험이나 관찰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부분 한 곳에 정착하는 게 자신의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르놀트 하우저는 다양한 국가의 도시들에서 생활해왔기 때문에 내게 아주 특별한 학자로 다가왔다.

이 책의 옮긴이 역시 한국 인문학의 거장인 백낙청이라는 점에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참으로 훌륭한 저서에 신뢰할만한 번역이 잘 어우러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낙청은 ‘개정번역판을 내면서’라는 글에서, 아르놀트 하우저와 이 시대의 한국 독자 사이에는 남다른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좋은 책을 써서 외국에까지 읽히는 것이야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한국에서 읽혀온 경위는 그야말로 특별한 바였다는 것이다. 1951년 영역본으로 처음 나오고, 53년에 독일어 원본 초판이 간행된 책이 1966년에 그 마지막 장의 번역을 통해 한국어로 읽히기 시작한 것이 그다지 신속한 소개랄 수는 없지만 당시 사정으로는 결코 느린 편도 아니었다고 한다. 나 역시 이러한 백낙청의 견해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 요즘도 인문 서적이 한국에서 번역되는 기간은 결코 짧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외국에서 10년 전에 나온 책이 마치 신간처럼 한국에 번역되어 출판되는 일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

이제 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자. 1권은 선사시대,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세를 다루고 있다. 보통 선사시대라고 하면 예술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쉽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선사시대를 떠올렸을 때 무지한 원시인들이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사냥을 하는 모습 이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대인들은 원시인, 선사시대라고 하면 지금보다 덜 발달되었다는 편견이 있지만 예술사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책을 읽어보면 선사시대에 놀라울 정도로 예술이 발달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이 책에서 구석기시대의 마술과 자연주의를 흥미진진하게 밝혀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는 이 책의 14쪽에서 선사시대의 자연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얼핏 보아 그보다 더 원시적으로 보이는 기하학적 양식에 앞서 나왔다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자연주의 예술이 근대예술사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발전단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사시대의 자연주의는, 엄격한 기하학적‧형식주의적 양식을 신봉하는 연구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과 달리, 순전히 본능적이고 발전의 가능성이 없으며 몰역사적인 현상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놀트 하우저가 문제삼는 자연주의적 예술은 처음에는 선을 중심으로 하여 대상을 비교적 딱딱하고 어색하게밖에 그릴 줄 모르는 모사에서 출발하여 드디어는 자유분방하고 재기 넘치며 거의 인상주의적이라 할 만한 수법에까지 이르는 예술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후기로 올수록 시각적 인상을 재현하에 있어 점점더 회화적이고 순간적, 즉흥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선사시대의 자연주의는 결코 경직되고 정체된 하나의 공식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살아있는 형식으로서 현실재현이라는 과업을 위해 너무나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며 그 성과도 천차만별이라고 아르놀트 하우저는 쓴다. 선택을 모르고 충동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연상태’는 이미 넘어선 지 오래인 반면에 틀에 박힌 예술적 공식을 만들어내는 문명의 단계까지는 아직 요원했다는 것이다.

또한 나는 제4장 중세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는 내가 존경하는 학자이자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가 중세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중세를 그저 ‘암흑기’정도로 여겨왔던 나의 고정관념을 바로잡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177쪽에 의하면 중세를 하나의 통일적인 역사적 시대로 보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중세 역사는 각기 완전히 독자적인 성격을 띤 세 시기의 문화로 갈라진다. 즉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시기인 초기, 궁정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가 그것이다.

어쨌든 이 세 시기 사이에 놓인 단층은 중세 전체를 그 앞뒤의 시대와 갈라놓고 있는 단층보다도 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세 시기의 경계선을 긋는 여러 가지 변동들은 근대적 생활감정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르네상스가 가져온 정신적 업적을 오히려 능가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중세의 예술이 중세 초기에서 전성기로 넘어가면서 그때까지의 엄격한 여러 구속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극히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예술로서의 성격은 잃지 않았으며, 교회 중심으로 조직되고 그리스도교 일변도의 감정을 지닌 사회의 표현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2권에서는 르네상스, 매러니즘, 바로크가 3권에서는 로코코,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4권에서는 자연주의,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가 이어진다. 문학, 예술을 사랑하는 교양인이 되고 싶다면 한 번 정도는 가볍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시리즈를 읽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비싼 커피를 마시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비싼 뮤지컬을 본다고 해서 교양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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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핸드폰 너무 봐서인지 인쇄된 활자를 한시간 이상 보기 너무 힘듭니다.
하지만 교양인 되고 싶으니 일단 장바구니에 넣겠습니다.
김영하씨가 그랬던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사놓은 책 중에 골라 읽는 거라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