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방이 더러워질수록 김첨지가 된 기분

in #sct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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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더러워질수록 김첨지가 된 기분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해!"

운수 좋은 날이 떠오르는 날이다. 물론 설렁탕은 아니고 …….


이 글을 쓰기 전 공대 친구에게 '운수 좋은 날'을 기억하냐 물으니 설렁탕밖에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다. 그래서 아주 간략하게 줄거리를 복기해보자면.


  • 현진건 작가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의 줄거리

병든 아내를 둔 인력거꾼 김첨지는 그날따라 유독 가지 말라고 말리는 병든 아내를 두고 돈을 벌러 나오고, 그날따라 유독 손님이 많이 들어와 돈을 많이 번다.
퇴근 시간, 슬슬 집에 가야 하는데 이유 모를 불안감 때문에 주춤거리던 김첨지는 마침 단짝 치삼이를 만나 에라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늦게 들어 갈란다! 싶어 술을 마신다.


얼큰하게 취한 김첨지는 아내가 좋아한다는 설렁탕을 사서 집에 돌아가지만 아내는 이미 죽어 있었다. "설렁탕을 사 왔는데 먹지를 못하냐"라는 명대사는 이 장면에서 나온 것.


그러니까, 요즘 김첨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자주 느낀다.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도 아내가 변을 당했을까 들어가기 두려운 그 기분처럼. 빠르게 확인해야 하는데도 이미 늦었다 싶어 돌아가길 망설이듯 말이다.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얘기긴 하지만 내겐 방청소가 그렇다. 회사와 가까운 연인의 집에서 잠을 자는 빈도가 늘면서 정작 내 집에 가는 날들이 줄었기 때문이다. 당장 저번 달만 말한다고 해도 15일가량을 밖에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내 방엔 소홀해졌다. 당시에는 '내일' 먹겠다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음식은 일주일 넘게 그대로 방치되었고, 출근하며 버리자고 생각했던 요거트는 점점 부패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자꾸 이 물음이 들었다. 음식물 쓰레기는 잘 비웠나? 화장실 쓰레기통을 마지막으로 비운 게 언제였더라? 식물에 물은 주고 나왔나?


방을 나온 2-3일까지는 괜찮았지만 집에 슬슬 돌아가야 할 때쯤부터 김첨지가 됐다. 이곳저곳에 자라날 것 같은 곰팡이가 무서워서, 배수구를 열면 날파리가 있을 것 같아서, 애지중지 키웠던 식물이 다 죽어버렸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방에 뛰어가 얼른 냉장고를 열고 곰팡이가 폈는지 안 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도 그게 무섭고 싫어서 연인의 집에 더 머물렀다.


이젠 집에 가야 했다. 연인의 옷을 빌려 출근하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바지나 치마는 빌릴 수 없었으므로 같은 하의를 3일 연속으로 입게 되자 몸이 근질거렸다. 퇴근하고 오랜만에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을 때 괜스레 마음이 쿵쿵거렸다. 상상 속에서 내 방은 참혹 그 자체였다. 옷가지가 이리저리 널브러진 건 물론, 화장실엔 벌레가 있고 냉장고엔 곰팡이가 잔뜩 펴 있는. 식물은 그 사이에서 유언을 남기고 픽 쓰러져있고. 나는 김첨지가 아내를 안고 설렁탕을 소리친 것처럼 반려식물 콩쥐를 안고 소리칠 게다. 왜 물을 마시지 못해! 왜 햇볕을 쐬지 못하느냔 말이야! (당연히 내 잘못이다.)


계단을 오르면서 더 초조해졌다. 30초 뒤면, 10초 뒤면 그 참혹함을 봐야만 했다. 심호흡을 하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방은 …… 예상 그 자체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배수구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지우기 위해 뜨거운 물을 빠르게 틀었다. 냉장고는 정말 열어야 할까 수십 번을 망설이다가 코를 막고 열었다. 곰팡이가 아주 뽀송뽀송 푹신푹신하게 펴 있었다. 깔깔, 나는 눈물을 흘리며 냉장고를 청소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겨울옷과 봄옷을 바꾸자고 옷장 정리도 했다. 꼬박 하루 넘게 걸렸다. (그러니 정돈되어 있는 저 썸네일 사진은 하루 뒤의 결과물이다). 나는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야 드디어 편안해졌다. 연인의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과는 또 다른 정말 궁극의 편안함. 마음 한구석을 괴롭히던 방청소 문제가 해결된 거니까. 뜬금없지만 그 편안함을 느끼고 나서야 내가 폭식을 끊게 된 이유를 알았다. 폭식으로 감정을 청소하는 건 맛에서 오는 단기적인 기쁨이지, 불안함의 근원을 대면하지 않으려는 두려움에서 기반한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냉장고를 자주 열기로 했다. 진짜 냉장고는 물론, 마음의 냉장고도. 곰팡이가 보기 싫어 냉장고를 닫지는 않겠다고 말이다.




😯

스팀잇에 들어와서 글을 마지막으로 쓴 시간을 보면 자꾸 놀라네요.
시간은 왜 이리도 하릴없이 흘러가는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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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건설사를 다녀서 그런지 집도 유기체로 느껴요
계속 관심가지고 가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집도 유기체처럼! 아무래도 월세나 전세처럼 잠깐 머물고 갈 곳이라고 생각하면 일회용품을 청소하는 기분도 들었는데 ㅠㅜ 맞습니다. 오늘 하루 있는 공간이니까요!

용감히 집에 들어오신 걸 축하드려요.
왜 내가 다 후련하지??

ㅋㅋㅋㅋㅋㅋ지옥문을 여는 기분이었습니다.... 한순간을 참고 청소하고나니 마음도 정말 훨씬 가뿐해졌어요....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