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23. 연대장을 마치고 주월 국방무관으로
연대장을 마치고 국방대학교 합동참모대학교 교수부 차장으로 보직되어 나왔다. 우선 살 집을 찾아 보았다. 이대용은 연대장을 마치고 수중에 남은 돈이 모두 5만 3천원 정도 있었다. 3만원은 어렵게 살고 있던 동생에게 주었다. 연대장을 하면서 봉급으로 모두 8만 3천원을 모았다. 연대장하면서 그렇게 많은 돈이 들지는 않았다. 살 사먹고 부식 사먹는 것 이외에는 별로 돈 들일이 없었다. 오이같은 작물도 직접 심어서 먹었다.
서울에 나와서 집을 얻으려 했는데 삭글세 보증금이 8만원은 되어야 했다. 어찌 어찌 융통해서 삭글세를 얻었다.
13평에 방하나 있는 집을 얻었다. 집주인이 육군대위였다. 어느날 몸이 좋지가 않아 집에 조금 일찍 들어갔더니 그 집 할머니에게 7살먹은 큰아이가 야단을 맞고 있었다. 이유인 즉, 큰 아이가 집의 흰 담벽에 숯검정으로 1,2,3,4를 써놓았다는 것이다. 마침 집에 아내도 없었는데 큰 아이가 야단을 맞고 있었다. 그 할머니는 이대용을 보더니 죄송하다면서 하소연을 했다. 자신은 과부로 살면서 식모살이해서 애들 교육을 시키고 돈을 모사서 어떻게 하든 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집을 조그맣게 하나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은 자신에게 전부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낙서를 하는 것을 보고 야단을 쳤다면서 죄송하다며 이해해 달라고 했다.
이런 광경을 본 이대용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제까지 전쟁터에서 사선을 수없이 넘었고 올바르게 살려고 했지만 이러다가 육군대령이라고 해도 아이들 중학교도 제대로 보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은 성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견제를 하고 있어서 장군으로 진급하기도 어려웠다. 이제는 뭔가 방향을 바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부정하면서 군생활을 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육군대학에서 같이 교관을 하던 이석재를 찾아갔다. 당시 이석재는 총무처 장관을 하고 있었다. 큰 아이가 겪은 이야기를 하면서 월급을 조금 많이 받는 곳으로 갈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다. 이석재는 해외 대사관 무관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무관의 한달 봉급이 720불을 받는 다는 것이다. 당시 이대용이 받았던 육군대령 봉급을 달러로 환산하면 60달러 정도였다. 무관은 대령의 1년치 봉급을 월급으로 받았던 것이다.
이대용은 자신은 일체 부정을 하지 못하니 내가 그만큼 일하고 봉급을 받으면 되지 않겠냐며 무관으로 나가는 방도를 물었다. 이석재는 5.16 이전에는 그냥 추천을 해서 무관을 보냈는데, 5.16이후에는 시험을 쳐서 파견을 한다며 시험을 치라고 일러주었다. 당시에 월남과 필리핀 그리고 태국에 무관 자리가 비어있었다. 영어와 제2외국어 시험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대용은 불어도 조금 공부를 했기 때문에 월남 무관에 지원을 하고 시험을 보았다. 합격을 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3년간 월남 무관으로 부임을 했다.
월남 무관으로 발령을 받았을때 나중에 월남 대통령이 된 티우(Ngueyen Van Thieu)는 대령으로 사이공 외곽을 담당하는 비엔호아(Bien Hoa) 지역의 사단장이었다. 티우는 이대용과 미국 합동참모대 교육을 같이 받았던 동기생이었다. 그리고 티우는 미육군대학을 이대용보다 1년 먼저 졸업했다. 오키나와에서 미 합동참모대 교육을 받을때 티우와 이대용은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매우 친하게 지냈었다.
젊을때 두부부가 같이 친했기 때문에 서로 친하게 지냈다. 얼마 있다가 구데타가 나더니 티우는 장군으로 진급을 하고 곧이어 군단장을 마치고 참모총장이 되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article is very interesting sir,really awesome work sir @wisdomandjustice
스토리 점점 재미있군요.
와.. 이분은 정말 못하는 것도 없네요!
청렴과 유능의 표본 이십니다
계속 곧은길을 걸으셨네요!
다음 글이 점점 궁금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