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발상 003 | 안경을 쓰고 싶었다
안경이 어울리지도 않았고 눈이 나쁘지도 않았지만, 안경을 쓰고 싶었다. 세상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어딘가에 숨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안경은 왠지 조금이라도 나를 가려줄 것만 같았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찰나의 표정, 순간적인 제스처 같은 것들이 그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한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며, 나는 그러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강단 있게 내보이기에는 너무나도 유약한 인간이었다. 곧잘 후회할 만한 말들을 내뱉기도 했고, 누군가의 한마디에 쉽게 흔들리기도 했다. 성숙하지 못한 민낯을 안경테 너머에 숨겨두고 싶은 심리였을까.
보안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안경점을 지나갈 때마다 들어가서 써보곤 했다. 나는 정말 안경이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어쩜 그렇게 써보는 것마다 족족 다 이질감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테가 굵은 것이나 얇은 것이나, 안경알이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각진 것이나 둥근 것이나 그 어떤 것도 '내 것!'이라고 할만한 안경을 찾지 못했다. 안경을 쓰지 못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충 적당한 것을 살 법도 한데, 갈팡질팡하며 그렇게 안경을 써보며 돌아다니다가 끝끝내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살아가게 되었다.
안경을 쓰고 싶었던 나의 마음은 진심이 아니었을까.
나에게 새로운 안경이 생겼다.
그 안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안경이었다. 일종의 필터 같은 것이었다. 나에게 너무나도 꼭 맞고 나다운 안경이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안경이 내가 되고 내가 안경이 되었다. 나는 아니지만 곧 나인 그런 안경이었다. 부르는 것만으로도 온전히 내가 되는 듯했다. 필터라고 했지만, 결국은 나라는 사람을 강단 있게 내보일 단단하지만 투명한 필터를 장착하게 된 셈이었다. 그 어떤 색의 편견도 담지 않은 투명한 필터를 가진 안경.
가끔은 그것이 너무 내가 되어버려서 내가 안경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어느 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도 나는 그 안경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 안경을 소개했는데, 어쩐지 민낯을 내어 보였을 때의 부끄러움이 오랜만에 찾아왔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 안경을 벗어버려야 했던 것일까. 아니면, 천천히 내어 보였어야 했던 것일까. 안경은 분명 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매개체였는데, 나는 또 다른 안경 안에 숨고 싶어 진 걸까.
결국, 안경을 쓰지 않을 이유
살면서 잊고 지냈던 나는 한없이 어설프고 약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어린 날엔 그 사실이 너무 슬퍼서 그런 나를 안고 상처에 부들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안경을 쓰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가끔 다시 안경을 써볼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럴 땐, 내가 한없이 약해져서 괜히 강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찾아온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에 가리어진다고 해서 온전히 숨어있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약함을 인정하는 것 말고는 그것에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없다.
'온전한 나'라는 건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규정되어 있는 존재도 아닌 듯하다. 내가 나를 잘 알고 나답게 살아가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그저 끝없이 고민하고 넘어지면서 인생의 순간들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단편 발상
001 | 낯선 계절의 반복
002 | 바(Bar)의 데시벨
저 역시 정말 안경이 잘 안어울려요. 눈이 나빠져 안경을 고를 때 얼마나 많은 안경을 썼다가 벗었는지.. 몇년 째 쓰고 있는 네모난 뿔테 안경이 그나마 잘 어울려서 고집하고 있죠.ㅎㅎㅎ
안경과 민낯 그리고 본질, 안경으로 시작된 삶을 통찰하는 에세이 잘 읽었어요.
오히려 철 모를때는 더 쉬워보였던 '나답게 내 색깔대로 살기'가 사실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 지 매일 몸으로 느끼는 나날입니다.
맞아요. 나다운건 무엇인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이 복잡하고 모순적인 것이 나의 '색'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안경 잘어울리시던걸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