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글쓰기 -다섯 번째] 글쓰기 프로세서- 입력에서 출력까지의 과정
글이 손끝에서 나오기까지
지방에서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오늘 하루 서울역에서 막 서울에 도착한 사람들을 붙잡고 조사한다면 서울에 오게 된 과정을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몇 년 동안 상경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를 거쳐 서울로 왔고, 누군가는 즉흥적으로 그 날 저녁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왔다. 또 어떤 이는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 모르고 탔다가 서울로 오게 되었다. 글이 활자의 형태로 표현되기까지의 과정 역시 저마다 다양하다.
글이 생각의 재료에서 가공되어 나오기까지는 다양한 과정을 거치는데, 그 과정의 다양함은 ‘계획’의 정도 내지는 ‘임의성’의 비중으로 기준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 어디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꼼꼼히 계획한 후 썼는지, 반쯤 계획하고 나머지 반은 쓰는 동안에 떠올랐는지, 그것도 아니면 계획 없이 무작정 써내려갔는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첫 번째 유형은, 여행을 가서 어느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어떤 찻집에서 차를 마실지, 그 날 어떤 옷을 입고 돌아다닐 것인지 까지 계획하여 여행하는 것처럼 글을 쓴다. 소설가 이문열은 쓸 소설의 페이지와 그 페이지마다 들어갈 내용까지도 딱 맞게 계획해 놓고 글을 쓴다고 들었다. 감옥에 있던 유시민은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를 쓸 때, 미리 모든 내용과 짜임새, 구조를 머릿속에서 구상해놓고, 글을 쓸 때는 머릿속의 내용을 한 번에 받아 적기만 하였다.
우리가 이 첫 번째 유형처럼 글을 쓰려면, 이문열 소설가처럼 내가 구상한 이야기들이 더 이상의 개선의 여지가 없는 최상의 이야기임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유시민 작가처럼 글을 여러 번 고쳐 쓰기가 어렵거나, 발상을 따로 메모할 수 없는 수감 상황이면 좋다.
나의 경우, 쓴 글의 한 20%는 이와 같은 과정으로 썼다. 낮의 대부분의 시간은, 몸으로 글을 쓰는 행위가 어려울 때가 많다. 직장에선 일하느라, 집에선 육아에 몰입하느라 말이다. 글쓰기에 있어서는 수감 생활과 비슷한 여건이 만들어 지곤 한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뇌뿐인데, 숟가락을 들면서, 아이를 들어 비행기를 태워주면서, 마트에 가서 우유를 사주면서, 머릿속으로 글의 얼개를 짜고 발상을 발전시킨다. 백지를 마주할 수 없는 상황이 길어지면, 머릿속에 날리던 볍씨들은 어느 새 정리되어 고슬고슬한 밥이 된다. 어둠이 내리고 아이가 잠들고, 나의 거룩한 하루 임무가 마무리되면 머릿속에 지어진 밥을 주걱으로 떠서 활자의 그릇에 담아내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난 유시민 작가가 <항소이유서>를 쓸 때 거쳤던 글쓰기 프로세서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완성된 글을 끄집어내어 글을 쓸 때는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별로 고칠 말도 없고, 적확한 단어를 찾아내려고 할 필요도 없다. 이미 다 된 밥이다.
두 번째 글쓰기의 유형은, 반 정도 계획하고 나머지 반은 직접 쓰면서 찾아 채우는 경우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속에 ‘글 광산’을 갖고 있다. 그 광산에는 엄청난 글 광맥이 묻혀 있다. 그 안에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글들이 있는 것이다. 그 글들은 우리가 캐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영원히 땅 속에 묻혀 있게 된다. 애초에 없는 글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레이더 하나씩을 갖고 있다. 그 레이더는 우리가 쓰고자 하는 소재와 관련되는 우리의 기억, 지식, 정보 등이 묻혀 있는 곳을 알려준다. 레이더는 구식이어서, 뭔가가 묻혀 있는 건 알려주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어떤 주제의 글을 쓸 때, 빈약한 재료를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면 쓸수록 적절한 문장과 단어들이 발견되는 경험 말이다. 글 광산은 내가 삽을 들고 직접 파보지 않으면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다. 펜을 들고, 혹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 광산을 파내려갈 때 비로소 그 아래에 묻힌 것들은 내 것이 될 수 있다. 때론 기대하지 않았던 노다지를 파내는 경우도 있다. 묻혀 있던 것들이 엄청나서, 처음에 계획했던 방향과 다른 쪽으로 글이 전개되기도 한다.
나 역시 대부분의 글을 ‘글 광산’을 채굴하는 방식으로 쓴다. 미리 계획하는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나, 꼭 넣고 싶은 아이디어 정도다. 지금 쓰는 이 글도 그런 글 중 하나다. ‘글이 나오기까지의 여러 과정’에 대해 쓰고자 하는 방향성만 갖고 컴퓨터를 켠 것이다. 앞에서 사용된 비유들, 글의 얼개 등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 이후에 글 광산에서 파낸 것들이다. 나의 구식 레이더가 가리키는 지점을 파낸 결과다.
앤 라모트는 이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자신의 저서 <글쓰기 수업>에서 말한 적이 있다.
“소설 쓰기는 한밤중에 운전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오로지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만큼만 볼 수 있지만, 그런 방법으로 여행지까지 다다를 수 있다.” -E.L.닥터로
소설 쓰기뿐만 아니라 모든 글쓰기에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끝으로,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운전하듯 글을 쓰는 경우가 있다. 어떤 주제도, 어떤 아이디어도 정하지 않고 그저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많은 글쓰기 저서에서 ‘프리라이팅’이라고 부르는 글쓰기 방식이다. 이런 방식의 글쓰기는 주로 글쓰기 훈련에 활용할 수 있다.
글쓰기에 필요한 두 가지 정신적 능력이라고 하면, ‘창조적인 기능’과 ‘비판적인 기능’을 들 수 있다. 프리라이팅은 이 중 ‘창조적인 기능’을 극대화 하는 방식의 글쓰기다. 정제된 글을 쓴다기보다, ‘많이’ 생산하는 방식이다. 글 광산에서 무작정 많은 글을 채굴하는 것이다. 광물의 종류에 상관없이 말이다. 글쓰기 습관을 들이거나, 규칙적으로 글감을 제공하기 위해 유용한 방식이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으로 완성된 글을 쓰는 것은 한계가 있다.
계획적인 글을 쓰든, 글 광산에서 뜻하지 않았던 광물을 채굴하려고 하든, 우리는 무엇을 쓸까를 생각해야 하고, 그 ‘무엇’을 괜찮은 문장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발효 단지가 익어간다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하자. 보통 작은 파편 같은 아이디어만으로는 완성된 글로 발전시키기 쉽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그 파편 같은 아이디어를 다른 아이디어들과 연결하는 과정이다.
초등학교 과학 실험 중에, 백반 결정을 만드는 실험이 있다. 뜨거운 물에 백반을 녹인 포화 용액에 털실을 감은 철사를 넣어두고 식히면 물에 녹아 있던 백반들이 털실에 달라붙어 커다란 결정이 되는 것이다. 파편화된 아이디어도 큰 결정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큰 결정을 만들려면 ‘털실 감은 철사’ 같이 여러 아이디어가 달라붙을 중심점이 하나 있어야 한다. 그 중심점을 마음 속 단지 속에 넣어두고 기다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개의 발효단지가 있다. 그 안에는 아직 파편화된 아이디어가 들어 있다. 발효 단지 속 중심 아이디어들을 수시로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일상 속에서, 책 속에서, 영화 속에서 건져 올린 다른 아이디어들이 그 발효 단지 속 아이디어에 달라붙는다. 아이디어는 그렇게 점점 큰 결정이 되어 간다. 글을 쓰기에 충분한 크기로 결정이 자라면, 단지에서 꺼내어 글쓰기를 시작한다.
지금도 내 안에 있는 여러 발효단지 속에는 여러 아이디어들이 결정이 되어 가고 있다. 발효 단지가 열리는 시점은 순차적이지 않다. 어떤 것은 넣은 지 하루 만에 큰 결정으로 자라서 꺼내 쓰고, 어떤 것은 좀처럼 자리지 않아서 꽤 오래 묵혀둔 것도 있다. 이 글만 하더라도 꽤 오래 묵힌 것에 해당한다.
우리는 글만 쓰는 것이 아니고, 삶을 산다.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글을 써나가려면, 우리 마음속에 발효 단지를 여러 개 두고 일상에서 수시로 그것들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마음 속 발효 단지는 메모의 형태로 정리된 소재나 아이디어들을 수시로 펼쳐보는 걸로도 적용될 수 있다.)
글 광산을 적극 활용하라
앞서 여러 가지 글쓰기 프로세서를 살펴보았지만, 이 글에서 말하려는 요지는 결국, 글 광산을 적극 활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100% 계획된 글을 쓰는 (사실 완벽히 계획된 것처럼 보이는 글도 활자화되는 과정에서 임의의 것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사람들처럼 될 수 없고, 또 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수감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페이지를 정확하게 맞추어 글을 쓸 필요도 없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조그마한 결정이 되면 그걸 들고 곧장 글쓰기로 뛰어들자. 그 다음은 글 광산이 해결해줄 것이다. 삽으로 파는 족족,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표현과 문장을 발굴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거대한 광맥을 발견해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목적과 계획도 없이 손 가는 데로 프리라이팅을 하고, 남들이 그런 글에 열광해주길 바라지마라. 짧은 시간이라도 아이디어를 발효 단지에 넣고, 작은 결정이라도 된 것을 꺼내보라. 결정이 된 그 시점엔 이미 글의 방향과 목적이 정해져 있을 것이다. 거기서 꺼낸 결정을 들고, 바로 글 광산으로!
이 글의 요지와 맞닿아 있는 윌리엄 스태퍼드의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작가란 이야깃거리를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불러내는 과정을 발견한 사람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가끔은 객관적인’ 문학적 글쓰기 강좌는 계속 됩니다.
[문학적 글쓰기] 연재목록
#(번외편) 극한 글쓰기 : https://steemit.com/kr/@kyslmate/5wuvb2
#(네 번째) 글쓰기의 소재 찾기 : https://steemit.com/kr/@kyslmate/4f2pnm
#(번외편) 글쓰기의 절대 고수 : https://steemit.com/kr/@kyslmate/5ggbee
#(세 번째) 글쓰기 필터와 논리적 구성에 대하여 :
https://steemit.com/kr/@kyslmate/3v5agv
#(두 번째) 글쓰기와 구체성 : https://steemit.com/kr/@kyslmate/7mzwch
#(첫 번째) 글쓰기와 문체에 대해 : https://steemit.com/kr/@kyslmate/3zmw1m
<멋진 이미지 만들어 주신 @ceoooofm님 감사드립니다.>
Cheer Up!
Thank you!
저는 머릿속으로만 구상하면 어느새 휘발되어 날아가 버리더라구요 ㅠㅠ.. 그래서 뭔가가 퍼뜩 떠오르면 어디에라도 적어놓으려고 노력합니다. 주로 카톡의 내게 쓰기 기능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죠 ㅎㅎ
네 퍼뜩 어디에 적어놓는 것 참 좋은 습관입니다. 전 스마트폰 메모장 어플을 주로 사용합니다. 거기에 적어놓고 수시로 들여다보며 머릿속 발효단지 속에 넣죠. ^^ 카톡의 그 기능도 유용하겠네요.
이번편은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
어두컴컴한 글 광산 안에 외롭게 선 광부의 모습이라니!
파면 팔수록 아, 이거 맥을 잘못 짚었다, 별거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는 삽을 던져버리고 싶기도 해요. 그 괴로움 때문에 글쓰기가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 :-'( 이 글을 읽고 당장 연장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해요!
글 광산에 서면 외로워도 글을 캐는 기쁨에 시간가는 줄 모르지요ㅎ 맥을 잘못 짚을 경우도 있죠. 그럴 땐 잘못된 맥에서 나온 재료로 생각지도 않은 글을 쓰면 되지요ㅋ 어떻게든 글은 나옵니다. 건필하시기를 바랍니다^^
쭉 읽으면서 나는 어떤 타입인가 생각해봤는데요... 오늘도 제목만 적어 놓고 종일 어영부영 지내다가 겨우 짧은글을 써내는걸 보니, 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없고 발효를 저장할 공간도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다만 광산을 적극 활용할 시간은 좀 많은 듯해요. 그래서 뉴스거리나 뒤지고 있나봅니다.
ㅋㅋㅋ
마지막 "작가란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불러내는 과정을 발견한 사람이다." 이 말에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넉넉하게 위안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빵님 자신의 글쓰기 과정을 되짚어보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인 것 같아요^^ 자신만의 글 쓰는 기법을 가지고 계실텐데 거기에 더해서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ㅎ
잘 배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즈앗!!! ㅋ
조선생님도 멋진 새해되시길 바랍니다!!^^ 가즈아앗~~!!
새해엔 저도 작가님처럼 글을 잘 쓰고 싶어요~ ㅋ 가즈앗!!! ^^
이미 잘쓰십니다! 일상을 조선생님만의 언어로 잘 풀어내시던데요~~! 가즈앗ㅋ
글쓰기는 정말정말정말정말 어려운거 같아요 ㅠㅠ
어려울수록 시도하다보면 조금 편해질 날이 올거예요. 퐈이팅하세요^^
글을 써도 수정해도 계속 보게되며 어느 문구를 써야 더 괜찮을까 항상 고민도하고 글을 끝도없이 수정하는등 고뇌의 긴 여정인거 같습니다. 창작의 고통 공감 하시리라 봐요. 좋은 귀감 얻어갑니다.
해피정님은 글에 대한 애착이 있으시네요. 글을 써놓고 계속 수정하고 적확한 문구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는 그 과정이 글쓰기 능력 향상의 길이죠. 창작의 고통 즐길 수 있길 바랍니다^^
와, 글 광산 백프로 공감이 됩니다. 방향성만 가지고 키보드를 두들겼는데 막힘없이 써지는 글이 있더라구요. 어떻게 써야지 고민하는 글은 계속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데, 광산은 막힘없이 캐내져 스스로 신기해하던 경험을 해 보니 쏘울메이트님의 의견에 적극 공감이 됩니다.
막힘없이 써질 때 느껴지는 희열은 대단하죠^^ 글을 쭉 써오신 분들은 이미 경험이 있으니 공감하시는 것 같네요. 이터널 라이터님 막힘없는 글 광산 채굴하시길 바래요ㅎ
헉.. 글 쓸때보다 제 곡을 쓸때 한번 더 생각해 봐야겠다 싶은 글이네요. 제 음악 광산은 다 써버린건지.. 광산을 만들어 놓지 못했던건지 글 광산은 다른 책에서 채워질 수 있는 부분이라 하면, 저는 음악을 덜 들은건지.. 으 복잡해졌습니다.
광산을 다 써버릴리가 있나요.ㅎㅎ 레이더가 엉뚱한 곳을 가리켰는지..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음악에 집중해보세요.ㅋ 살룬님의 새로운 곡을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