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 042

in #kr-pen6 years ago

별을본다_02.jpg
ⓒzzoya





  택시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가려던 나는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바람에 그 상태로 딱 정지했다.
  “내일 새벽같이 일어나야 해요.”

  오늘 밤은 안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젯밤 못다 이룬 일을 오늘 밤 완성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채 피어보지 못한 채 사그라져야만 했다. 그런 말은 어떻게 포장해도 전혀 낭만적이지 않고 남자답지도 않다. 자고로 남자라면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미덕을 갖추어야 하지 않나. 나는 그 미덕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긴 말코비치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요.”
  내가 대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말하고 나니 어쩐지 교묘하게 압박을 한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약속할게요.”
  약속이라는 뜬금없는 소리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구요?”
  “내가 미치더라도 당신을 지켜 줄게요.”

  원래 나는 마초를 지향하나 여자를 지키느니 어쩌니 하는 말은 좀처럼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강한 거부감이 들기 때문이다. 대체 뭐로부터 여자를 지킨단 말인가? 악당? 벌레? 정작 매일 같이 여자를 괴롭히는 불평등, 편견, 성폭력적 발상과 발언으로부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들이 입만 살아서 생각 없이 내뱉는 말 아닌가. 그런데 내가 그 말을 한 것이다.

  “뭐로부터요?”
  “뭐든지요. 말코비치 같은 놈으로부터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나로부터일지도.
  “잭, 당신은 미치지 않아요.”
  그녀는 일부러인지 힘차게 미소 지었다.
  “알아요. 그냥 다짐해 두는 거예요. 이 생각을 무의식에 못 박아 두는 거죠. 일종의 안전장치랄까.”
  “쓸데없는 걱정하는 쪽으로 머리가 발전한 것도 집안 내력인가 봐요.”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말했다.
  “왜요? 지미가 뭐라고 했어요?”
  그녀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무언의 대답을 했다. 비밀이라고…….

  다음 한 주는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게 불만이었다. 말코비치가 스스로 출두하는 일도, 지미에게 고용된 사람들에게 끌려오는 일도, 누군가에게 또다시 또라이 짓을 해서 체포되는 일도 어느 것 하나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 또한 너무 바쁜 일과에 파묻혀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다. 센터에 들른 날도 그녀는커녕 지미조차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우연히 마주친 수지 큐가 썩 반갑지는 않았다.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을 실패했다고 표현하는 데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내 경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명백한 실패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준비도 안 된 미숙아였다. 수지 큐를 본다는 건 그때의 미성숙한 나와 대면하는 일이다. 그 수치심이 나를 못 견디게 했다. 자신의 치부를 담담히 마주 볼 수 있는 사람을 진정한 성인이라고 한다면 나는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무늬만 성인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헤어진 연인과 친구로 지내는 인간들이 그런 성인이라는 말은 단연코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치부를 인지할 인성도 수치를 느낄 감성도 부족한 저능아일 뿐이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요즘 어때?”
  “하반신 마비 환자의 재활을 돕고 있어. 어제는 발가락 하나를 움직였지.”
  “멋지네.”
  “글쎄. 애초에 친구와 손잡고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짓거릴 안 했다면 그럴 일도 없었겠지.”
  “맨바닥으로 말이야?”
  “평소에 운동이라고는 숨쉬기밖에 안 하는 것들이 수영장까지 멋지게 도약할 수 있을 리 만무하잖아. 안 그래?”

  수지 큐는 전보다 더 냉소적으로 변해 있었다. 냉소는 내 전공이다. 나에게 받은 상처의 깊이만큼 나에게서 물든 흔적이었다. 연인끼리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나 정작 가까이 지낼 때는 눈치채기 어려울 때가 있다.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컸는지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 더 강렬하게 체감하는 것과 같다. 바로 이 순간이 그랬다. 내게 물든 얼룩이 눈앞에 나타나자 당혹스러우면서도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왜 하필 그런 부정적인 면을 배웠는지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다. 나 또한 수지 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면이었다. 원래 수지 큐는 도전과 모험을 즐기는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수지 큐로부터 과감성을 전해 받은 나는 그 힘으로 이별을 향해 전진했던 것이다.

  “넌 어때? 잘 돼 가?”
  수지 큐가 물었다. 무엇에 대한 물음인지 알면서도 나는 시치미를 뗐다. 어쩐지 그 주제로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보다는 수지 큐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너야말로 아직 좋은 소식 없어?”
  내가 되묻자 수지 큐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무슨 소식?”
  “릭이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던데.”
  “진심이야? 그 인간이랑 나를 엮고 싶어?”
  수지 큐의 눈이 살기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나 짜증이라고 하기에는 훨씬 날 선 기운으로 번뜩였다.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그 인간이 너한테 그러든? 좀 도와달라고?”
  “아니, 그건 아니고…….”
  기세에 눌려 우물거리다가 나는 되는대로 지껄였다.

  “그냥 우연히 만났다가 들은 거야. 그녀랑 같은 아파트에 살더라고.”
  아차.

  “그날 밤 사실 사건이 좀 있었는데…….”
  아차.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수지 큐는 카페테리아 앞을 지나는 사람들에게로 무표정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는 커피를 하염없이 보다가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들이켰다.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문득 에스프레소 한 샷 당 설탕 한 티스푼이라는 파커 씨의 취향이 떠올랐다. 설탕을 타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 가야겠다.”
  수지 큐는 그렇게 운을 떼더니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맞다. 주말에 집에 간다며?”
  “어? 어.”
  “불꽃놀이는 놓치겠네.”
  “글쎄, 뭐 그날은 불꽃놀이야 어디에서든 하기 마련이니까.”

  약간 얼떨떨한 채로 대답이 나왔다. 왜 묻는지 저의를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모른 척하기에는 내 눈치가 너무 예민하게 발달해 있었다. 수지 큐는 내가 그녀와 불꽃놀이를 보러 갈 건지 궁금했던 것이다. 수지 큐와 한창 불타올랐을 때 그날에 대한 얘기를 한 게 기억났다. 전망 좋은 호텔 방에서 불꽃놀이를 배경 삼아 격렬한 밤을 보내자는 계획이었다.

  “그럼 주말 잘 보내.”

  수지 큐는 그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이번에는 진짜로 일어났다. 어색함은 여전히 내 주위에 남아 심장을 짓눌렀다.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현실이 씁쓸했고 심지어 서글프기까지 했다. 처음부터 연인이 아닌 좋은 친구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후회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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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 제법 쌓였으니 종종 들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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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감상&잡담

잭은 돌아왔고 저는 잠시 들른 걸로 하겠습니다.

아 수지큐~!!! 그리운 그이름....

잭이 휘둘리는 느낌이네요...웬지 이용당하는 어린애 같은...흠~

나에게 받은 상처의 깊이만큼 나에게서 물든 흔적이었다

수지 큐로부터 과감성을 전해 받은 나는 그 힘으로 이별을 향해 전진했던 것이다.

너무 아프네요
하필..그 힘이 이별에 이르게 한 원동력이 될 줄이야

어리석은 애들이 꼭 엄한 데 힘을 써요...

그가 돌아왔군요.

수지큐는 왜 불꽃놀이를 놓친다고 했을까요...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던데...

수지 큐에겐 기쁜 예감 아닙니까 ㅋㅋ

아... 아닌가?

제 예감은 틀린 걸로...ㅎㅎㅎ다행이네요 휴

저의 연애 스타일과 수지큐의 그것이 비슷해서 저는 계속 수지큐의 편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ㅜ 상처받은 아이의 절제가 느껴지는... 가슴아픈 글입니다 ㅜ

저는 수지 큐가 그냥 좋으니 편을 들게요...

수지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는 수지큐가 첫사랑인가봐요. 그녀를 그냥 보낼수가 없군요!

힝 수지큐... 요사이 클레어보단 수지큐가 더 좋으네요. 잭 미워...

읽는 제가 식은땀이 나네요ㄷㄷㄷㄷㄷ

오늘은 이 글이 팍 와 닿네요 ㅋㅋㅋㅋㅋㅋ
냉소는 내 전공이다. 나에게 입은 상처의 깊이만큼 나에게서 물든 흔적이었다.
주지 규는 이름이 ㅋㅋㅋㅋ 이주일 생각나요 자꾸 ㅎㅎ

수지 큐, 그리워했더니 등장이 늘었네요.
계속 그리워해야지!

수지큐의 시크함을 보니 북키퍼님 댓글이 생각나네요.ㅎㅎ

난 이 연애 반댈세..

수지큐 마음도 좀 이해가 가는 걸요? ㅎㅎㅎ

여긴 다들 수지 큐 편이라는...

이것은 명백히 이름 덕분입니다 ㅋㅋㅋ

헤어진 연인과 대면했을때 어떤 얘기를 나눌 수 있을지 참..
경험한 적은 없지만 잭의 마음이 공감되는 화였네요,

수지큐 마음에는 냉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힘으로 살아갑니다^^

수지큐는 참 당당한 여자인 듯합니다.
헤어진 연인에게 지금의 연인과의 일을 물을 수 있다니...
아무말도 못할 것 같은데 말이죠..

수지큐랑 있으니 잭이 점점 찌질해지는 느낌입니다..

처음부터 연인이 아니고 친구였다면..

뭐... 이런 생각을 하다니...ㅜㅜ

아.. 마음 아퍼...
수지 큐 등장할 때마다 속상해요. 괜히 잭이 미워지고. 그러다가도 미워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런거죠. 사랑이란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까요.
아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잭과 수지큐는 연인이 되었을 거에요. 그래야 지금의 잭이 있을거구요.

+)댓글 읽어보니 수지큐 편이 저뿐만은 아니네요 ㅋㅋ

잭이 잘못했는데요!

잭은 돌아왔는데 여전히 바쁘신가보네요 ㅜ
건강은 챙기시는 걸로요~!!^^

감사합니다. 저는 바쁜 건 아니고... 언제고 나가고 싶은 바람을 적었습니다.

[끽연실] 트위터

밤이 싫다.

아무도 없나요.

너무 늦게 왔군요.

안 늦었어요.

다행입니다. 어제는 새벽 3시에 24시간 김밥천국에서 고기만두, 치즈라볶이, 돈까스김밥을 배달시켜 먹었지요.

곱창이나 막창은 그 시간에 배달하는 곳이 없어서요...

아니 왜 그 시간에 배달을 시켜 먹냐구요 ㅋㅋㅋ

창문이라도 열 수 있다면 한결 좋을 텐데.

허전. 허탈. 허무.

삼시세끼 시리얼만 먹고도 살 수 있을까.

아... 안 되나요. 시무룩

안돼요. 유전자변형 옥수수+가공 탄수화물 어휴 안됩니다.

아, 그 이유인가요? 혹시 모르죠. GMO 덕분에 슈퍼 파워가 생길지도!

당분과 나트륨이 하도 오버되어서 슈퍼 파워도 흑.콰.될듯!

수지큐도 잭도 맘이 짠 하네요. ㅜㅜ